7살 때 내 보물 1호는 피아노였다. 종이인형이 시시하게 느껴질 무렵 여자아이의 미감을 한껏 자극하는 디테일들이라니. 부드럽게 새긴 양각 무늬, 새하얀 건반 위에 놓인 새빨간 융, 게다가 피아노와 의자를 덮고 있는 하얀 레이스 덮개까지.
그러나 며칠이 지나 피아노를 볼 때마다 울상을 짓게 되었으니, 의자 다리에 끼운 형광색 테니스공 때문이었다. 테니스공에 열십자로 칼집을 내 튤립 모양으로 식탁이나 피아노 의자 다리에 끼우면 의자를 당기거나 밀어넣을 때마다 소리가 나지 않고 바닥도 상하지 않았다. 하필 내 순결한 피아노에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생김새라니! 그건 미감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던 당시 집집마다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처음 테니스공을 그렇게 이용할 생각을 한 누군가를 밤마다 저주했다.
테니스공은 테니스를 치는 데만 쓰는 건 아니다. 저렴한 가격에 손쉽게 구할 수 있고, 탄성이 좋은 고무공에 펠트를 씌워놓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요모조모 생활 속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문을 열 때 소음을 줄이려고 테니스공을 벽의 문 손잡이 위치에 붙여둔다거나, 테니스공 조각을 이용해 잘 안 열리는 병뚜껑을 열 수도 있다. 의 ‘무한상사 특집’에서 길이 유재석에게 준 신년 선물처럼 칼집만 쓱싹 내서 동전지갑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본인이 그 디자인에 만족한다면야). 실제로 테니스공을 이용한 동전지갑은 여러 가지 디자인으로 판매되고 있다. 가격은 18달러 정도.
테니스공을 이용한 아이디어 상품은 생각보다 많다. 얼마 전 일본의 인테리어 소품을 소개하는 ‘메타모노’에서는 테니스공의 탄성을 이용한 ‘미스터 윌슨’(Mr. Wilson)이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벽에 고정해둔 채 편지나 펜 등을 끼울 수 있게 만들었는데, 얼굴을 연상시키는 단순하면서도 귀여운 디자인이다. 지갑이나 시계 케이스, 전자기기 거치대 같은 소품부터 테니스공으로 만든 의자나 소파, 심지어 침대까지 있다.
생활 소품으로만 쓰이는 것도 아니다.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고무공이니 비교적 안전해 아이와 강아지가 갖고 놀기에도 좋다. 실제로 테니스공은 색감 때문인지 강아지들이 무척 좋아하는 장난감이란다. 이에 착안해 강아지용 볼머신이 인기를 끄는가 하면, 새총처럼 테니스공을 ‘발사’할 수 있는 도구까지 나왔다.
이처럼 부상의 위험이 적은 특징 덕분에 테니스공은 다른 스포츠 종목에까지 진출했다. 경기장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부상 위험 때문에 소극적으로 경기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 부상도 많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던 한국 사회인 야구는 대안으로 테니스공을 찾아냈다. 세부 룰을 약간 수정한 ‘테니스공 야구’는 2002년 ‘한국테니스공야구협회’ 출범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리그를 다듬어 현재 15개 팀 단일 리그로 팀당 32경기를 치르는 어엿한 새 종목이 됐다.
김지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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