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00m 달리기 최고 기록은 22초. 출발하는 순간 나를 남겨두고 아이들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면, 언제나 내가 알 수 없는 힘에 뒤로 밀려나고, 그 뒤로는 제자리에서 달리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당혹감과 좌절감이었다. 곧 체육 시간이 끔찍해졌다. 한동안 나는 체육 시간이 2교시인 화요일이면 1교시에 조퇴하는 불량학생이 되었다. 그건 심지어 꾀병도 아니었다. 실제로 무지막지하게 배가 아팠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나 ‘신경성 위경련’ 같은 말을 어떤 이는 정신적 나약함이라고 보기도 하겠으나 나에게 그건 철저하게 몸의 문제다.
그런 내가 딱 두 번, 체육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운동을 잘하는 아이들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겹치기 출전을 고려해도 누구나 한 종목에는 나가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티가 나게 편애하는 분이었고, 체육 분야에서 늘 내가 소외되고 주눅 드는 걸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100m 달리기를 못하는 것은 순발력이 떨어지는 것뿐이며, 그러므로 너는 지구력이 강해 오래달리기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나를 설득했다. 나도 혹했다.
그러나 내가 페이스 조절을 위해 천천히 출발할 때 아이들은 내가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 애들에게는 그것도 페이스를 조절한 거였다. 따라잡으려고 애쓰다 보니 어느새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곧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세 바퀴쯤 달리자 아이들과 한 바퀴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보다 못한 선생님은 달리고 있는 아이들 한가운데로 들어와 나를 안아들고 나왔다. 응원석의 아이들은 수군거리거나 야유를 보냈다.
그때 나는 울었는지, 창피해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응원석 선생님 곁에 앉아서 보던 400m 릴레이 경기는 생생하게 기억난다. 계주는 체육대회의 꽃이었다. 학교에서 제일 잘 달리는 아이들이 전부 나왔고, 다른 경기보다 드라마의 요소가 강했다. 바통을 전달받을 때의 애타는 심정, 주자가 바뀔 때마다 생기는 역전에 대한 기대. 마지막 주자 중에서도 제일 잘 달리던 아이가 바통을 놓치며 넘어졌다. 그 아이의 팀이 뒤처져 있었으나 매년 역전에 성공했던 아이기에 기대에 차 있던 응원석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는 곧 벌떡 일어나서 달렸다. 반바퀴 이상 뒤처져 있었지만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3위를 제치지 못하고 꼴찌로 들어갔다. 응원석의 아이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내가 받았던 야유와 그 아이의 박수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이 내가 살면서 포기하고 싶은 일이 하나둘 늘어갈 때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질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전시품으로 그때 그 아이가 꼭 쥐고 일어나던 릴레이 바통을 내놓는다. 지금 뒤처진 채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손에 꼭 쥐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김지현 작가
*‘판다의 스포츠 박물관’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들과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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