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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힘껏 내달리는 청춘의 트라이

중학교 때 우연히 시작한 럭비로 국가대표된 김성수씨…직장다니며 비인기 종목 선수로 활약하는 삶의 열정
등록 2011-07-22 17:55 수정 2020-05-03 04:26
럭비 국가대표 김성수씨. 한겨레21 김경호

럭비 국가대표 김성수씨. 한겨레21 김경호

나는 스포츠 주간지에서 1년6개월 정도 편집기자로 일했다. 그때 펴낸 70권 정도의 잡지 중에 럭비에 관한 기사는 단 한 번 실렸다. 2007년 당시 하나뿐이던 서울 오류동의 럭비 경기장이 없어질 위기라는 단신이었다. 국가대표 선수인 친구가 있어 늘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구장은 없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전남 강진에 럭비 전용 구장이 새로 생겼다는 기사를 봤다. 선수들을 생각하면 기쁜 일이지만, 관객석에 몇 명이나 앉아 있을지를 떠올리면 짠한 마음이 든다.

‘자장면 한 그릇’에 시작한 럭비

그러니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이 인터뷰는 순전히 사람들이 럭비에 관심을 좀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사심을 품고 진행했다. 삼성중공업팀에 들어가 거제도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하러 거제도에 가겠다고 하니 “그건 좀 오버”라며 서울에 있는 친구를 소개해줬다. 그 친구도 국가대표냐 물으니 “국가대표의 핵”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럭비팀과 한국전력 럭비팀에서 센터를 맡고 있는 김성수(29)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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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럭비를 시작한 건 ‘자장면 한 그릇’ 때문이었다. 그가 다니던 전남 여수 충덕중학교에는 럭비팀이 있었다(럭비팀이 있는 학교가 서울·경기권을 제외하면 각 도에 하나씩일 정도로 드물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운명에 가깝다). 중학생치고 큰 덩치에 육상·축구 등 각종 운동을 하던 김성수씨에게 감독이 눈독을 들였다. 정식으로 입부해서 훈련을 시킨 게 아니라 시합에 나가서 이기면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주겠다고 꼬드겼다. 그래서 나간 대회에서 덜컥 이겨버렸다. 그러고는 감독의 ‘작전’이 시작됐다.

“저희 학교가 높은 언덕에 있어서 등굣길이 좀 험난했어요. 중3 때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체육 선생님이 ‘성수야, 타!’ 이러는 거예요. 탔는데 학교로 안 가고 유턴을 해요. 어디 가냐고 물어도 그냥 푹 자래요. 중간에 휴게소에 도착했는데 차 문까지 잠겨서 내릴 수도 없고. 납치를 당한 거죠. 엄마한테 다 말해뒀으니까 일단 자래요. 혼날 걱정은 없으니까 그냥 잤죠.”

그렇게 서울에서 열리는 춘계 리그에 나갔다. 선수 등록까지 미리 해두었으니 그날의 납치는 치밀한 계획 범죄였던 셈이다. 선생님은 도착해서야 부모님께 전화하라며 전화기를 내밀었다. 젊은 시절 배구선수였던 어머니는 그가 운동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던 차였지만 “이왕 간 거 다치지 말고 잘해라”라고 말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날 열린 대회가 그를 럭비로 이끌었다. 시합의 재미를 알았다기보다, 엄청난 승부욕이 발동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선수들에게 33-3으로 대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럭비를 해서 꼭 쟤네를 이기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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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3일 오후 럭비 국가대표 김성수씨가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모교인 고려대 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지난 7월13일 오후 럭비 국가대표 김성수씨가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모교인 고려대 운동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어머니의 반대를 꺾은 건 순천고등학교 럭비팀 감독이었다. 럭비를 하면 고려대나 연세대를 보내주겠다는 설득에 어머니가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렇게 하게 된 럭비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고교 입학 전 동계합숙 훈련부터가 문제였다. 처음으로 체계를 갖춰 고된 훈련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 짐을 싸서 집으로 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와 고된 훈련을 참아낸 데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터.

팀워크를 알게 해준 소중한 곳

“훈련은 힘든데 시합 뛰는 건 재밌었거든요. 친구들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어요. 운동도 안 하고 시합만 뛰는 애라고. 지방에서 럭비를 해서 고대나 연대를 들어가려면 정말 잘해야 하거든요. 팀에서 비중 있는 선수니까 조금만 아파도 연습을 빠지면서 시합은 꼬박꼬박 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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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만 16살 선수는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2명뿐이었다. 럭비를 우연히 하게 된, 하고 나서도 재밌는 것만 하려던 어린 선수가 순전히 재능만 믿고 “거만 떨”(그의 말을 빌리자면) 만도 한 일이다. 당연히 대학 진학도 순조로웠다. 고려대와 연세대에서 서로 오라고 불렀다. 그는 당시 고연전에서 8연승을 거두고 있던 연세대에 꼭 가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고려대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고등학교와 연세대 사이에 트러블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까지 고집을 부려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강팀에 분위기도 화기애애한 연세대에 간 친구들이 부럽고 그와 달리 ‘빡센’ 고려대의 훈련 때문에 그만두고 싶은 적도 많았다.

그런데 입학 첫해 춘계 리그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후반전에 교체선수로 들어간 그가 역전 트라이를 성공시켜 고려대가 연세대에 승리한 것이다. 게다가 그 뒤로는 승승장구, 그해 정기전에서도 이겼다. 그가 재학 중이던 4년간, 고려대 럭비팀은 연세대를 상대로 3승1패를 거뒀다. 함께 만들어내는 승리의 기쁨, 선배·친구들과 쌓여가는 정, 그런 것들이 점차 학교에 애정을 갖게 했다. 그는 대체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할 뿐 큰 야심이나 목표가 없는 성격이지만, 나중에 학교와 후배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결심만은 지키고 싶다고 했다. 힘든 걸 하기 싫어해 팀원들에게 미움받던 소년에게 팀워크를 알게 해준 소중한 곳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도 자신이 플레이를 잘한 경기가 아니라 팀원들에게 의미 있는 경기다.

상무에서 제대하기 전 마지막 경기였다. 15명 중 10명이 제대를 앞둔 동기였다. 진로가 다들 달랐다. 국내 실업팀은 상무를 빼면 네 팀뿐이다. 프로 진출을 할 수 있는 선수는 적었다. 일본으로 진출하는 선수도 있었지만 그 경기가 인생의 마지막 경기가 되는 선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경기에 임했다. 절실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뛰는 선수도 있었다. 2007년 전국체전, 국내 최강 삼성중공업을 대파하고 결승에 진출해 한국전력까지 꺾었다. 경기가 끝나고 덩치 큰 15명의 남자가 모두 울었다고 했다. “축구로 치면 그때 저희 팀이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못지않았어요.”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목소리가 들떴다.

월·화·수 오후 훈련 외 총무과 직원 근무
10년 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제 목표는 40살까지 현역으로 뛰는 건데, 힘들겠죠?” 그가 멋쩍게 웃는다. “그렇지 못해도 그저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남달리 큰 꿈 같은 건 없어요.” 한겨레21 김경호

10년 뒤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제 목표는 40살까지 현역으로 뛰는 건데, 힘들겠죠?” 그가 멋쩍게 웃는다. “그렇지 못해도 그저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남달리 큰 꿈 같은 건 없어요.” 한겨레21 김경호

우리나라에서는 럭비를 시작하는 것부터 흔치 않은 일이다. 초등학교나 어린이팀은 거의 없고, 럭비팀이 있는 중학교에 다녀서 우연히 럭비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축구나 야구처럼 선수를 목표로 학교를 정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나마 대학 진학, 군 입대, 실업팀 진출 등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매 순간 실력이 최고가 아니면 럭비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선수들이 생긴다. 김성수씨는 럭비계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런 그에게 럭비를 포기해야 하는 동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조금은 잔인한 질문이지만 안타깝다, 럭비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저 그 친구들도 잘하고 있다고 답했다. “저라면 아마 그 친구들처럼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럭비 하듯 하면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그러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밖에서 보면 비인기 종목에서 살아남지 못한 비운의 선수들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인생에서 있는 힘껏 살아남는 청춘들일 뿐이라는 말이다. 하긴 최선을 다해 경기를 뛰는 게 전부인 선수들에게 럭비를 활성화할 방안 같은 걸 물어보려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렇다면 청소년 대표부터 국가대표, 국내 최고 실업팀 선수까지 럭비에서 모든 걸 해본 그는 10년 뒤에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했다. “제 목표는 사실 40살까지 현역으로 뛰는 건데, 힘들 수도 있겠죠?” 그가 멋쩍게 웃는다. “그렇지 못해도 그저 그때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죠. 남달리 큰 꿈 같은 건 없어요.”

한국전력에서는 선수 은퇴 뒤에도 직원으로 정년을 보장하고 있다. 지금도 월·수·금 오후에는 훈련을 하지만 다른 날에는 총무과 직원으로 정상 업무를 한다. 지금은 4년차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고되다는 럭비 훈련보다 더 힘든 게 사무실에 온종일 앉아 있는 거였다고 한다. 훈련 전날이라도 회식이 있으면 상사들이 건네는 술잔을 거부하지 못해 과음하고 괴로워했던 건 일반 신입사원들과 다르지 않다.

“처음 입사해서 복사를 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운동만 하느라 복사기를 만져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을 했어요. 계속 복사기 앞에서 망설이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정면 돌파를 했지요. ‘저 복사기를 한 번도 써본 적 없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조금 창피했는데 그냥 ‘어, 그래?’ 하고 가르쳐주시더라고요. 생각보다 훨씬 쉽던데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잖아요. 다른 일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모르면 배우면 되고, 운동하듯 열심히 하면 안 될 게 없겠죠.”

팀에서 궂은 플레이를 도맡아 하는 센터이자 뉴질랜드 대표팀 주장이던 우마가 같은 선수가 되고 싶었고, ‘의리’와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그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결혼이다.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매 경기 그를 보러 와 아직도 매번 거친 경기에서 부상당할까봐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알고, 생업이 바빠 경기를 보러 오지는 못하지만 고향에 내려가면 함께 낚시를 하는 아버지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걸 보니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아이를 낳을 일만 남은 것 같다.

만나보면 팬이 될 만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그가 후배들이 가벼운 숏게임을 뛰고 있는 운동장으로 달려가 합류했다. 잔디가 푸른 운동장에서 럭비공이 통통 튀어다니는 걸 보는데, 밤새워 밀린 일을 하느라 쌓였던 짜증과 피곤이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은 분은 서울 오류동과 전남 강진, 경북 경산 송화에 럭비 구장이 있으니 경기 소식이 들리면 한 번쯤 찾아 보시길 권한다. 럭비 경기는 룰을 잘 몰라도 넘치는 박진감 덕에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게다가 럭비선수들은 대체로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해맑은 미소, 투박한 말투가 매력적이다. 만나보면 팬이 될 만하다. 참, 올해 한국 럭비팀은 아시아 디비전1 리그에서 싱가포르를 58-19로 이겨 아시아 톱5(한국·일본·홍콩·카자흐스탄·아랍에미리트)로 재진입했다. 내년 아시아 5개국 럭비대회에서 멋지게 뛰는 김성수 선수와 국가대표팀의 모습도 놓치지 말자.

글 김지현 시나리오작가 지망생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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