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축구라는 전쟁 종결자

등록 2011-04-29 18:53 수정 2020-05-03 04:26

보스니아 내전 중 이그마산에 휴전을 알리는 무전 신호가 도착하자, 보스니아 지역방위군과 세르비아군은 이제 ‘양팀 선수’가 되어 만난다. 선수가 아닌 부대원들은 살아 있는 터치라인이 되어 앉는다. 누구도 무기를 지니지 않고서. 어젯밤 죽은 누군가의 주검을 치우고, 한 개비 남은 담배는 경기 뒤를 위해 아껴두고, 그들은 축구 경기를 한다. 공평하게 번갈아 심판을 본다. 그러나 이 휴전이 경기 중에 끝나면 어떻게 될까? 2-0으로 지역방위군이 지고 있는 상황, 휴전이 끝나자 세르바아군은 경기 따위 없었다는 듯 상대편을 포로로 잡고 총을 겨눈다. 지역방위군의 지휘관이자 골키퍼인 디노 조프는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채 소리친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후반전이 남아 있단 말이다! 만약 우리가 역전하게 된다면, 여기서 아무도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약에 너희가 이긴다면… 넌 평생토록 빌어먹을 비열한 살인자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경기가 재개된다. 세르비아 선수들은 반칙을 하고, 세르비아 장군은 편파 판정을 하고, 세르비아산 터치라인들은 상대팀 선수들을 끌어내 린치를 가하지만, 결국 지역방위군은 4-3으로 역전한다. 누구의 환호도 박수도 없는 경기 종료의 순간.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실제로 이런 경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건 보스니아 출신의 젊은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장편소설 의 한 대목이니까. 전쟁을 목격한 소년이 자라 상상하고 재구성한 이 휴전 중 축구 장면은 전쟁이 어떤 건지, 그리고 우리는 전쟁 중 서로에게 어떤 폭력을 가하는지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때 축구는 전쟁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또한 전쟁의 반대편에 선, 인간적인 어떤 것이다. 실제로도 전쟁 중, 축구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을까?
2005년 10월, 코트디부아르는 장기 내전에 시달리는 한편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디디에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내전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 내전의 당사자인 두 집단의 대표가 나란히 경기장을 찾아 코트디부아르의 월드컵 진출 장면을 함께 즐기던 날이었다. 실제로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드로그바가 ‘검은 예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다. 그런가 하면 1932년부터 4년간 벌어진 그란차코 전쟁에서, 파라과이 축구 선수들은 황량한 사막에서 쓰러져가는 부상자들을 위해 국경 너머에서 축구로 돈을 거둬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것이다. 1992년 두 명의 멕시코 종군기자는 사라예보에서 군인들에게 둘러싸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총이, 그리고 적대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여권을 내밀었을 때 장교는 총을 내려놓고 멕시코 기자들을 끌어안는다. “멕시코, 우고 산체스.”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던 우고 산체스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외국 선수였다.
김지현 시나리오작가 지망생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