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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진 사람이 당구비 내는 관행은 언제부터?

등록 2009-04-16 16:15 수정 2020-05-03 04:25
진 사람이 당구비 내는 관행은 언제부터? 사진〈한겨레21〉류우종 기자

진 사람이 당구비 내는 관행은 언제부터? 사진〈한겨레21〉류우종 기자

이따금 회사 동료들과 당구를 즐기는 회사원입니다. 실력에 비해 ‘다마수’(당구 에버리지)가 높은 편이어서 게임에서 자주 집니다. 그런데 당구장에서는 대개 지는 사람이 게임비 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언제부터 이런 관행이 일반화된 겁니까?(물다마)

당구깨나 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게임비 ‘물리기’ 당구에 대한 씁쓸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용돈이 풍족하지 않던 고교 시절에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습니다. 당시 서울 시내 당구비는 10분당 500~600원 수준이었습니다. 당구 한 게임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1시간 안팎이었으니, 당구비 한번 내고 나면 가난한 고교생의 재정에 빨간 불이 켜지게 마련이었죠.

반드시 이겨야 했습니다. 실력으로 안 되면 방해공작(일명 겐세이)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당구 치는 상대방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시선을 교란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치는 순간을 포착해 기합 넣기, 끊임없이 말 걸기, 맞았는데 안 맞았다고 우기기, 맞힌 개수에서 하나씩 빼기 등의 치졸한 수법도 동원됐죠. ‘상대방 큐대 끝에 몰래 침 묻히기’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는 이미 ‘겐세이의 달인’이라 할 수 있겠죠. 저 역시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자유롭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당구원로회가 선정한 초대 ‘당구 명인’ 고 조동성씨는 이런 당구계의 현실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습니다. 1987년 창간호를 통해 그는 말했습니다. “(1930년대 초) 당시 당구 요금은 8전. 요금 지불 방식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계가 필요없는 공동 지불 방식이었다. 승자 한 사람만 ‘그냥’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등수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게임료를 내야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점자가 하점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형태의 현재 방식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렇습니다. 게임비 ‘물리기’의 기원은 바로 시간제 계산 방식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역시 조씨에 따르면 시간제 요금 방식이 도입된 것은 1940년대 초·중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지적했습니다. “시간제 요금 방식은 당구 본연의 스포츠십을 외면케 한 결정적 원인이 됐다. 훗날 당구장이 사교장이 아닌 유흥장으로 전락된 것도 바로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의 출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당구 명인 양귀문씨도 비슷한 견해입니다. 대한당구협회 이사로 재직하던 1991년 11월 양씨는 신문 칼럼을 통해 “지는 사람이 당구비를 물어야 한다는 관행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폐습”이라며 ‘물리기’ 행태를 통렬히 비판했습니다. 게임비는 참가자 모두가 똑같이 내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 자신을 ‘한국 최고수’라 소개한 김동수(64) 한국당구아카데미 연수원장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게임비 ‘물리기’의 장단점이 있다는 겁니다. “당구 요금을 똑같이 내다 보면 게임이 무미건조해서 재미가 없어지죠. 이기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집중력과 근성을 길러주는 장점도 분명 있습니다.”

김동수 원장의 이야기도 일리는 있습니다. 다만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김 원장은 이런 말도 했거든요. “대개 200점 수준에 이르려면 집 한 채 살 돈을 날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워낙 소질이 있어서 최고수가 된 것 아니겠느냐. 난 거의 물린 적이 없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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