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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사형되지 않았다면



이승만 정권 민심 읽고 3·15 부정선거 무리수 두지 않았을지도

진보당 지속해 한국 정치 외연 넓혔을 텐데
등록 2010-06-17 21:45 수정 2020-05-03 04:26

조봉암, 다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법살인의 기억 때문인가? 혹은 평화를 말하면 친북좌파가 되는 세상 때문인가? 아니면 진보 정치의 척박함 때문인가?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은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겨우 9개월 전이었다. 비극적 시차다. 조금만 일찍 이승만 독재가 무너졌다면, 또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광기의 마녀사냥을 중단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봉암 같은 ‘실용적 진보’가 한국 정치사에 존재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실용적 진보 앞세운 철저한 현실주의자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은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 살인의 주역은 이승만 정권이었다. 한겨레 자료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은 1959년 7월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 살인의 주역은 이승만 정권이었다. 한겨레 자료

조봉암은 누구인가? 한때는 사회주의자였다. 일제 치하에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나온 엘리트 사회주의자였다. 조선공산당 창건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 직후 그는 조선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박헌영과 갈라섰다. 그해 6월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천시민대회 때 조봉암은 “조선 민중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성명서를 뿌렸다. 박헌영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개적으로 전향 선언을 한 셈이다. 그는 당시 좌익도 우익도 아닌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조봉암은 제도 밖의 급진주의자가 아니라, 제도 안에서 개혁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좌익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자들이 단독정부 수립에 불참했을 때, 그는 참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승만이 임명한 농림부 장관이었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좌익계의 농지개혁 요구를 무마하고, 자신의 개혁 의지를 표명하며, 지주정당인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발탁했다. 물론 그의 장관 재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농지개혁 저지에 사활을 건 한민당은 그를 끌어내리려 했고, 이승만은 이를 방조했다.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진보당을 만들고 강령을 발표할 때 제일 먼저 비판한 것은 ‘크렘린의 충실한 앞잡이 공산 역도’였다.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공산도당’에 이용당한 중간파 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조봉암에게 대한민국은 남북통일의 모체이며 통일 독립자유국가 건설의 기본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본적 이념주의자가 아니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고, 실용적 진보였다.

조봉암은 또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고 야반도주한 이승만 정권과 달랐다. 가장 앞장서서 전쟁을 주장하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도망간 ‘무늬만 보수’인 사람들과 달랐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국회 부의장이었다. 당연히 국회의 중요 문서를 챙겨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강 철교 폭파 직전에야 서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홀로 남겨진 그의 아내는 한강 다리를 건너지 못했고, 서울에 남아 있다 납북되고 말았다.

평화통일론, 금기를 넘어서는 상상력

이승만은 그런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서 죽였다. 왜 그랬을까? 그가 이승만 정부에 도전할 수 있는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그것이 진보당 사건의 본질이다. 조봉암은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80만여 표를 얻었다. 1956년 5월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여 표를 얻었다. 신생 정당의 돌풍이었다. 보수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상황임에도 조봉암에게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무효표가 됐던 이른바 ‘신익희 추모표’는 185만여 표에 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500만여 표를 얻었다. 관권과 금권, 언론을 모두 동원한 선거에서 조봉암이 얻은 표는 이승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조봉암은 또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의 평화통일론은 다시는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전쟁이 남긴 증오의 시대에, 반공이 국가의 존재 이유였던 시대에, 그는 어떻게 평화통일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그는 국제정세에 밝았다.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54년 제네바 회담이었다. 국제사회가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최초로 그러나 마지막으로 논의한 회담이다. 1953년 휴전협정에서 3개월 내에 정치 협상을 시작한다는 조항 때문에 열렸다. 참여 국가들은 아무도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회담 자체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 회담은 통일논의에 물꼬를 텄다.

그리고 1955년 반둥회의가 열렸다. 아시아·아프리카 국가가 중심이 된 비동맹 세력이 새로운 세계 정치의 흐름으로 등장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평화공존’을 들고 나온 것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문에 소홀했던 국내 경제 재건을 위해 평화가 필요했다. 조봉암은 그런 점에서 시대의 물결 앞에 섰다. 그리고 평화 통일이라는 흐름을 탔다. 그러나 냉전반공체제는 시대의 흐름을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전쟁 불사가 존재의 기반이었다. 민주당의 조병옥은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기정사실화했다. 이승만은 어떤가? 일관성 있게 북진 무력통일을 고수했다. ‘중공과의 즉시 결전’을 주장하는가 하면, 1954년에는 ‘원자전만이 공산주의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떠들고 있었다.

암흑의 반도에서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은 빛이 났다. 대단한 논리도 아니었다. 그는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돼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 들었다. 수천 년 동안 단일민족이었고, 분단 상태로는 민족경제의 정상적 발전이 어렵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인류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허술하다. 그가 주장한 평화통일론의 주요 내용 역시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한 통일 방안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그는 북한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외국군 철수와 같은 북한의 통일 방안을 절충했다. 무력 북진통일론만이 허용된 세상에서 ‘평화’라는 개념 자체가 진보적 가치였고, 평화통일론은 금기를 넘어서는 상상력이었다.

미국도 놀란 ‘마녀 사냥’

사법살인의 주역은 이승만 정부였다. 그러나 그때도 또 다른 주역이 있었다. 하나는 언론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사법부였다. 언론은 사법적 판단에 앞서 인격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왜곡 보도를 남발하고 여론 재판을 주도했다.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 성격의 인삼이 든 상자를 받을 때, 그 속에 든 ‘괴뢰’의 지령문을 보고 불태워버렸다느니, 조봉암 집에서 그의 자필로 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견했다든지 하는, 사실이 아닌 소설을 썼다. ‘빨갱이 사냥’이었다.

사법부 역시 마찬가지다. 1958년 7월 1심 재판이 있었다. 당시 유병진 재판장은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불법 무기 소지 등을 근거로 조봉암에게 5년형을 선고했다. 7월5일 자칭 반공청년이라 부르는 괴한 수백 명이 법원에 난입했다. 그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훗날 밝혀졌지만, 일부는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자유당의 직속 조직인 반공청년단 소속이었다.

1심 재판에 놀란 이승만 정부는 적극적으로 재판에 개입했다. 권력의 시녀들이 법의 이름으로 살인에 적극 가담했다. 2심 재판은 1·4 후퇴 때 월남해 대검찰청 오제도 검사의 주선으로 판사에 복직된 김용진이 맡았다. 그는 종범의 자백, 그것도 고문에 의한 것을 인정했고, 검찰의 기소 내용 대부분을 수용했으며, 핵심적으로 평화통일론 자체를 북한의 주장과 동일한 것으로 문제시했다. 조봉암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3심 판결 역시 정권에 가까웠던 김갑수 대법관에게 배정됐다. 광기의 질주에서 사법부가 앞장을 섰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을 중단할 수 있는 존재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승만 정부가 평화통일론을 정부 전복 혐의로 규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규정했고,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주한 미국대사가 직접 이기붕을 찾아가 “미국이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것을 상당히 훼손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59년 7월31일 사법살인이 벌어졌을 때, 주한 미국대사관은 “놀람과 비통으로 쇼크를 받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했지만,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들은 냉전체제가 흔들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부터 사사건건 이승만과 갈등했지만, 그래서 한때는 강압적으로 이승만을 교체할 계획도 세웠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냉전의 전방초소가 필요했다. 한국의 민주화보다는 자신의 전략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판단했다.

조봉암은 시대를 앞서 살았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진보당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조봉암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승만 체제도 그렇게 한 방에 스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는 사법 살인으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했다. 광기가 무덤을 팠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는 결국 1956년 선거에서 놀란 이승만 체제의 과잉 대응이었다. 그런 점에서 죽은 조봉암이 살아 있는 이승만에게 복수를 했다.

이 대통령이 진보당의 등장에서 민심 변화를 읽었다면 그렇게 무리수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선거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될 수 있는 것이고, 그랬다면 4·19 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혼돈 속에서 자란다.

진보당이 지속했다면 한국 정치의 구도도 새롭게 정립됐을 것이다. 조봉암은 왜 진보당을 만들었을까? 보수 야당인 민주당이 민주 세력의 연합을 거부했기에 나온 불가피한 차선책이었다. 1956년 선거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의 구호에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논리로 대응했다. 깨어 있는 시민은 진보당에 표를 주었다. 민주당이 반이승만 세력의 대동단결을 선택했다면, 조봉암은 진보당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민심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야당이 만들어졌다면, 조봉암은 시대의 순교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분단국인 서독에서도 1960년대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이 집권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접촉을 통한 변화’를 내걸고 동방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는가? 조봉암이 살아 있었다면, 그 또한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16만여 표를 얻었다. 이승만이 얻은 표는 500만여 표였다. 관권과 금권이 동원된 총체적 부정선거에서 조봉암이 얻은 성과는 이승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겨레 자료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16만여 표를 얻었다. 이승만이 얻은 표는 500만여 표였다. 관권과 금권이 동원된 총체적 부정선거에서 조봉암이 얻은 성과는 이승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겨레 자료

색깔론, 민주주의 탄압 도구 되지 않았을 것

물론 반공의 시대에 사회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진보당이 집권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정당의 존재는 한국 정치의 외연을 넓히고 이데올로기 지형을 조금 더 균형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 냉전 반공주의라는 닫힌 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 가치들이 얼마나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졌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개발독재 시대에 인민대중의 복리를 중시하는 정당의 존재는 열린 가능성이다. 1950년대부터 진보 정치의 실험이 시작됐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정당정치의 발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리고 진보당이 존재했다면, 색깔론이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유용한 도구로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봉암은 색깔론이라는 마녀사냥으로 희생됐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색깔론은 탄압의 도구였다. 정적을 제거하는 데는 간첩 혐의를 씌우고 친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됐다. 진보당이 다수파는 아니라도 한국 정당사의 한축을 차지했다면, 그렇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냉전반공주의자들은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색깔론을 활용한다. 논리가 부족하면 무조건 친북좌파란다. 맨 오른쪽에 서서,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좌파란다. 조봉암을 죽인 세력들이 아직도 새로운 희생자를 찾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씁쓸하다. 21세기 한반도에서 아직도 색깔론이라는 유령이 배회하는 풍경은 언제쯤 끝날까?

김연철 인제대 교수·통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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