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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스페인 vs 이기는 브라질



미드필드에서 경기를 지배하는 ‘무적함대’와 효율적인 축구를 부활시킨 ‘둥가호’의 빅뱅이 다가온다
등록 2010-06-11 18:01 수정 2020-05-03 04:26
스페인의 ‘점유’인가 브라질의 ‘실리’인가. 2008년 6월29일 유로 2008 결승 스페인-독일전에서 결승골을 넣는 스페인 공격수 토레스(위)와 3월2일 아일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볼 경합을 벌이는 브라질 선수들. AP 연합

스페인의 ‘점유’인가 브라질의 ‘실리’인가. 2008년 6월29일 유로 2008 결승 스페인-독일전에서 결승골을 넣는 스페인 공격수 토레스(위)와 3월2일 아일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볼 경합을 벌이는 브라질 선수들. AP 연합

패스 성공 555 대 67, 점유율 86% 대 14%. 프로와 아마추어의 시합에서 나온 수치가 아니다. 4월28일 펼쳐진 바르셀로나와 인터밀란(이하 인터)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의 기록. 바르셀로나의 점유율 86%는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인 수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압도와 달리 바르셀로나는 이 경기에서 1-0 근소한 승리에 그쳤고 이는 1차전을 3-1로 승리한 인터의 결승행을 저지하기엔 부족한 결과였다. 지난 시즌 6관왕 바로셀로나를 넘어선 주제 무리뉴 감독의 인터는 결승에서 바이에른 뮌헨(이하 바이에른)을 격파하고 역사적 3관왕에 오르는 감격을 누린다.

챔피언스리그 경기로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바르셀로나와 인터가 월드컵의 ‘양대 우승 후보’와 적잖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 후보들이란 유럽 챔피언 스페인과 남미 챔피언 브라질이다. 근년에 이르러 스페인과 브라질은 서로 맞대결만 없었을 뿐 공히 놀라운 수준의 A매치 승률을 기록해왔고, 따라서 이들이 월드컵 어느 단계에서든 맞닥뜨린다면 그것은 자체로 전세계 축구팬이 고대해온 ‘꿈의 대결’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팀이 만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궁극적 승패가 더욱 진지한 관심을 끄는 이유는 두 팀의 대조적 경기 스타일이다. 서로 다른 축구 철학을 각기 성공리에 구현하고 있는 스페인과 브라질의 경쟁은 어쩌면 바르셀로나와 인터의 경합에 이은 ‘전술 전쟁의 제2라운드’일지 모른다.

점유가 압박을 무찌른다

‘압박’은 현대 축구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 하나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엔 어설픈 압박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탁월한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볼 점유’ 능력이 압박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빠른들 볼보다 더 빠르지는 않다. 따라서 볼의 점유를 오래도록 지속하는 능력은 줄기찬 압박으로 맞서는 상대를 먼저 지치게끔 할 수 있으며, 결국 압박에 의존하던 상대는 그것이 약화되고 허술해지는 순간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 “볼을 잘 돌아가게 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우리 시대의 축구팀을 통틀어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야말로 바로 이 ‘볼 점유’에서 가장 능수능란한 선수들로 구성된 두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그들의 중원에는 공통적으로 사비 에르난데스가 있다. 사비는 폭발적인 유형의 중앙 미드필더들에 비해 다소 눈에 덜 띄는 유형의 선수일지 모르지만, 절묘한 볼 간수 및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경기 전체를 통제하는 과업에서 세계 최고의 솜씨를 지닌 거장이라 할 만하다. 물론 스페인에는 사비 이외에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알론소, 다비드 실바에다 세스크 파브레가스까지 포진한다. 모두가 ‘플레이메이커’라 해도 좋을 이 스페인의 재능들은 볼을 순환시키고 점유율을 높이는 데 필요한 모든 기술을 갖추고 있다.

물론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유사성은 ‘볼 점유’라는 포괄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4-2-3-1 포메이션(투톱 기용에 비해 안정성에 좀더 신경을 기울이는 형태)에서 오른쪽 측면의 실바가 중앙으로 좁혀 들어오며 발생하는 측면 공간은 오버래핑을 감행하는 세르히오 라모스의 무대가 된다. 이는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리오넬 메시-다니엘 알베스’의 콤비네이션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 또한 두 팀은 전투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어쩌면 공통적으로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볼 점유에 능한 다른 동료들이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뒷받침하는 시스템에서도 유사하다.

‘실리’가 승리를 불러온다

브라질은 화려한 공격 축구의 대명사다. 이는 브라질 팬들의 전통적 열망이기도 하다. 특히 펠레가 활약하던 시대의 브라질, 지쿠와 소크라테스가 포진한 1980년대의 브라질은 그러한 축구의 표상과도 같이 여겨졌다. 하지만 카를로스 둥가 감독이 이끄는 지금의 브라질은 자국 팬들의 열망과는 판이한 방향을 추구한다. 그것은 둥가가 선수로 활약한 1994년 브라질 팀의 스타일과도 맞닿아 있는데, 당시 브라질은 유례없이 수비적인 선수 구성과 실리 축구로 1970년 이후 멀어진 월드컵을 되찾아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팬들은 당시 팀이 구사한 이른바 ‘지루한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둥가가 바로 그 ‘지루하지만 효율적인 브라질’을 부활시켰고 적어도 현재로선 대성공으로 진행 중이다. 특히 숙적 아르헨티나와 가진 잇단 경기에서 상대의 공격을 거칠게 틀어막는 동시에 효율성 만점의 골을 계속 작렬시켜 라이벌을 좌절시킨 모습들은 인상적이었다.

둥가의 스타일은 여러모로 무리뉴를 떠올리게 한다. 바르셀로나전에서 무리뉴의 인터는 낮은 지역으로 내려와 철저히 간격을 유지하는 지역방어(메시에 대한 대인 마크는 없었다)를 펼치는 한편, 위험 지역 안으로 들어온 상대에겐 여지없이 조직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바르셀로나의 공격력을 봉쇄했다. 인터의 이러한 견고함은 결승전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역시 높은 점유율에도 인터의 수비벽을 열지 못한 바이에른은 오히려 디에고 밀리토를 앞세운 인터의 가공할 역습의 제물이 됐다. “낮은 지역으로 내려와도 좋다. 적은 수로만 공격해도 좋다. 골을 넣고 이기면 되는 것 아닌가!”

감독들의 기본 성향은 차치하고라도 인터와 브라질은 수비진을 구성하는 선수들의 면면만으로도 유사성의 냄새를 풍긴다. 자신의 포지션에서 작금의 세계 최고를 자부할 법한 줄리우 세자르, 페레이라 루시우, 더글라스 마이콘이 인터와 브라질에 공통적으로 속한 선수들. 또한 인터가 보유한 ‘베슬레이 스네이더르-사무엘 에투-밀리토’의 역습 라인은 개별적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카카-호비뉴-루이스 파비아누’ 조합에 대비될 만하다. 오른쪽의 마이콘이 오버래핑을 시도할 때 그 뒤를 커버하는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에서도 두 팀은 유사하다.

융통성이 중요하다

이렇듯 대조적 전술 성향의 두 팀이지만, 스페인과 브라질이 완전히 ‘일차원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실상 스페인이 2년 전 유럽을 제패할 수 있던 것도 볼 점유 능력에다 어느 때보다 좋았던 수비력, 역습 상황에서의 빠른 공격 전개 등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브라질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의 평균 기량 면에서 여전히 훌륭한 브라질이 모든 팀을 상대로 모든 상황에서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따라서 어쩌면 두 팀의 승패는 자신의 스타일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한편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누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느냐에 달렸는지 모른다.

한준희 한국방송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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