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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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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네바 회담이 타결됐다면


대화 계기만 만들었어도 냉전적 적대 관계 상당히 완화됐을 것
등록 2010-03-26 16:46 수정 2020-05-03 04:26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올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기억의 해다. 그러나 ‘잊지 말자 6·25’ 등 냉전 시절 많이 접했던 풍경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평화의 미래를 위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1954년 제네바 회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네바 회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다. 휴전협정 이후 한국 문제를 둘러싼 첫 번째 회의이고,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 참여한 첫 번째 국제회의다. 국제정치사에서도 의미 있는 회담이다. 영국이 세계 외교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주연 역할을 했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로 넘어갔다. 신생국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 외교 무대에 등장한 회담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 참여한 첫 국제회의

제네바 회담은 또한 실패가 예고된 회담이었다. 1954년 4월26일 시작되어 6월15일까지 50여 일간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물론 참여국 누구도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회담이었다. 그러나 거의 두 달 동안 한국의 통일 문제에 대해 나올 수 있는 모든 방안이 거론되었다. 평화체제의 실마리도 담겨 있고, 경제협력의 필요성도 거론되었다. 만약 당시의 제네바 회담에서 그중 몇 개라도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네바 회담의 소집 근거는 휴전협정이었다. 휴전협정 4조 60항에 휴전 뒤 3개월 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조항은 왜 들어갔을까? 휴전회담 초기 공산 진영은 ‘즉각적인 외국군 철수’를 주장했다. 이에 유엔군 쪽은 ‘철군안은 정전 성립 이후에 다룰 정치 문제’라는 입장으로 맞섰다. 정치회담 개최는 양쪽 타협의 산물이었다.

1954년 1월25일 베를린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영·불·소 4개국 외상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정되었다. 이후 실제로 회담이 열릴 때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우선 당사자인 한국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변영태 외무장관은 그해 2월20일 “무력으로 해결 안 된 것을 정치회의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제네바 회담을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협상이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회담 참여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는 소모적인 정치회담을 다시 개최하는 ‘소위 강대국’들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찼다. 회담 개최 8일 전까지도 회담을 거부하던 남한은 결국 미국과의 협의 과정에서 남한군 증강에 대한 미국의 원조 약속과 회담 운영에 관한 몇 가지 언질을 받고 참여를 결정했다. 이 대통령은 제네바 회담을 받아들이는 발표문에서도 “만약 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은 무익하며 위험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남한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내몰 것”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반대로 북한은 적극적이었다. ‘인물이 고운’ 여자 수행원 5명을 포함해 대규모 대표단을 보냈고, 제네바 교외의 ‘호화로운 별장’을 본부로 사용했다.

1954년 제네바 회담은 휴전협정 이후 한국 문제를 다룬 첫 번째 국제회의였다. 4월27일 회담에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인 홍진기(앞에서 세 번째) 당시 법무부 차관이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유민문화재단

1954년 제네바 회담은 휴전협정 이후 한국 문제를 다룬 첫 번째 국제회의였다. 4월27일 회담에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인 홍진기(앞에서 세 번째) 당시 법무부 차관이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유민문화재단

참가국 선정을 둘러싼 갈등도 심각했다. 특히 인도의 참여 문제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 심각한 외교 갈등을 불러왔다. 당시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 영국은 중국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등장할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영국은 소련과 한편이 되어 유엔에서 미국과 표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이 중립국, 즉 인도를 참가시켜 중국의 유엔 가입을 추진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갖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인도는 초청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인도 외상 메논은 제네바로 갔고, 무대 밖에서 중재 역할을 했다.

참가국 선정 방식을 둘러싸고도 갈등이 심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미국이 유엔 쪽의 초청자가 되고, 소련이 북한과 중국을 초청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 유엔국 가운데 15개국이 참여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더 이상 한국 문제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들며 불참했다. 그래서 모두 19개국이 모였다.

인도 참여 여부 놓고 미-영 갈등 빚기도

제네바 회담의 주요 의제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의 범위 및 국제 감독, 외국군 철수, 유엔의 권위 문제 등이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반도 통일 문제를 다룬 처음이자 마지막 회의였다.

회담 초기, 한국은 유엔 감시 아래 북한만의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선거 전에 중공군의 철수가 완료되어야 한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이에 대해 북한은 ‘외국군 동시 철수 및 남북한 동시 선거’를 주장했다. 차이가 컸다. 양쪽 주장 사이에는 38선처럼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있었다. 상대방이 받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다른 참여국의 공감을 얻을 필요는 있었다.

이미 연합국 내부의 입장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외상은 한국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전체 한국 선거에 찬성할 것을 희망한다고 언급했고, 뉴질랜드 대표 역시 남한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북한과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 정부가 양보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는 한술 더 떠 총선거 이전에 중공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한국 입장을 외면하고 양군 동시 철수 원칙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변영태 장관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이 토착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14개 항목의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으로 제네바 회담에 참여했던 로버트 올리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는 총선거 전에 ‘중공군의 철수’ ‘북괴군의 철수나 항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올리버와 변영태 장관이 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이같은 방안을 발표한 이유는 한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회의에서 발표하고, 사후에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러나 변영태 장관은 제네바 회담이 끝난 뒤 바로 해임되었다.

외교는 전쟁보다 어려웠다. 미국은 회담 막판에 종결을 서둘렀다. 공산 진영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연합국 쪽은 중구난방이었다. 미국이 연합국의 전략을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가국 모두 한반도 통일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관심이 쏠린 중요한 국제회의에서 저마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싶어했다. 회담 안건인 통일이나 평화는 얼마나 그럴싸한 명분인가. 물론 대부분의 제안은 당사자인 남한이 받기 곤란한 것이었다.

1954년은 열전에서 냉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미소 양극체제가 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 한반도 통일방안을 합의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최소한 긴장을 관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안이라도 합의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점에서 제네바 회담에 임하는 영국의 전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은 당시 상황에서 한반도 통일방안 논의가 ‘이상’이라고 판단했다. 중요한 것은 차선책이었다. 즉 한반도의 계속적인 분단을 기반으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북한 대표인 남일은 6월15일 평화 확립 문제와 관련된 제안을 했다. 외국군을 철수하고, 남북의 병력을 10만 이하로 감축하며, 남북 정부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이었다. 외국군 철수를 앞세운 것이기에 진정성이 의문시되는 주장이었다. 논의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제네바 회담이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최초의 평화 정착 방안이 그렇게 사라졌다.

50여 일간 이어진 제네바 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물론 경제협력 방안까지 폭넓게 다뤄졌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한반도 평화체제 관련 논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없었다.

50여 일간 이어진 제네바 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물론 경제협력 방안까지 폭넓게 다뤄졌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한반도 평화체제 관련 논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없었다.

교류·통일방안 논의 시작만 됐어도…

당시 어느 쪽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반쪽을 상대에게 넘겨주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대화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냉전의 대립 상황에서 이 또한 합의가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대화를 하는 동안 총성은 멈춘다. 만약 남북이 휴전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적 논의에 동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련된 논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없었다. 20년이 넘게 흐른 뒤인 1975년 9월이 돼서야 유엔총회에서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이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4자회담을 제안했다. 이후 한반도 평화체제 제안이 재론된 것은 그로부터 또 다른 20년이 흐른 뒤였다. 1996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식 제안되었고, 1997년부터 휴전 이후 처음으로 4자회담이 열리게 된다.

휴전 직후부터 논의를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만큼 치열했던 냉전의 추억은 정도가 덜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과거의 상처를 아물게 한다. 평화를 위한 논의는 전쟁이 남긴 적대 의식을 조금이라도 완화시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베트남전쟁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역사에서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방초소에서 비켜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합의에 이르지 않았어도 괜찮다. 대화의 흔적은 언제나 이후의 협상에 근거가 된다. 1950년대에 평화 정착 방안에 대한 논의를 했다면, 1970년대 초 7·4 남북 공동성명 국면에서 좀더 구체적인 신뢰 구축 방안에 합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일방안도 마찬가지다. 제네바 회담 당시 수많은 제안 중에서 특히 필리핀 대표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는 남북대표로 ‘헌법제정회의’를 만들어 통일방안을 연구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남북한의 통일방안이 워낙 큰 차이가 있어 조정이 어렵기 때문에, 최소한 지속적인 논의의 틀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아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통일 논의가 식상한 것으로 취급받지만, 1990년대 초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기 전까지 남북관계의 유일한 현안은 통일방안이었다. 7·4 남북 공동성명도 통일의 원칙에 관한 합의이고,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할 때도 통일방안 문제를 어느 수준에서 합의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휴전 직후부터 서로의 입장 차이가 크지만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면,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찾아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우리는 통일 문제가 시대의 과제임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1954년 제네바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목소리는 높았던 인도의 제안 역시 새겨볼 만하다. 당시 인도의 네루 총리는 남북한이 한동안 공존하면서 교역 등과 같은 저차원의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1989년 7·7 선언 이후 한반도가 걸었던 길을 그때 제시한 것이다. 이 점이 가장 아쉽다.

네루 총리 “교역 등 낮은 단계부터” 제안도

사실 1950년대는 경제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북한이 각종 대남 지원 의사를 표명한 시기다. 남쪽이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이기에 우리는 이 시기를 ‘제안 경쟁’의 시대로 부른다. 북한의 관성적인 대남 지원 제안을 덜컥 받은 것은 1984년 전두환 정부 때였다. 만약 동·서독의 경우처럼 상징적인 경제 교류라도 이때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치·군사적으로 대립해도 경제 교류만큼은 지속했다면 한반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를 수 있을까를 경쟁하던 두 개의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는 호혜적 영역을 찾아갔을 것이다. 산업 격차가 벌어지기 전에 경제협력을 했다면 더 많은 영역에서 서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1950년대에 경제협력을 시작했다면, 국제 환경이 변하는 1990년대 이후의 시점에서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양과 질이 변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북한의 대중국 경제 의존도가 너무 높아져 북한이 동북4성이 될 것이라는 우려는 없었을 것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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