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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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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통치 타운이 되다


1부 2회 일제시대 남산 ①…
통감부·헌병대사령부 등 탄압기구와 조선신궁·신사 입주한 식민지배 상징으로 탈바꿈
등록 2009-10-01 14:06 수정 2020-05-03 04:25

조선의 500년 도읍 한양의 남쪽 수호산인 남산이 왜색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중반부터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정국이 요동친 뒤 1885년 지금의 예장동(藝場洞) 일대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됐다. 본디 남산 주자동 막바지에 있던 평평한 넓은 잔디밭은 영문(營門) 군졸들이 기예를 연마하던 곳이었고, 단오절이 되면 청소년패가 씨름을 겨누던 곳이다. 그러기에 예장(藝場)이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경복궁 안마당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왕조를 우롱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 8도에서 모여든 박람회 관광객에게 개화한 경성의 근대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인 이 지도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와 남산의 조선신궁은 강조돼 자세히 그려진 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서대문형무소는 나와 있지조차 않다.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29년 조선총독부는 서울 경복궁 안마당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왕조를 우롱하며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당시 조선 8도에서 모여든 박람회 관광객에게 개화한 경성의 근대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박람회 당시 제작된 일종의 관광 가이드인 이 지도에는 행사가 열린 경복궁 일대와 남산의 조선신궁은 강조돼 자세히 그려진 반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서대문형무소는 나와 있지조차 않다.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군대 머물던 터 다시 찾은 일본

그런데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 부대가 지금 조선호텔 자리인 남별궁에 지원부를 마련하고, 예장동에 일본군 1500여 명이 진을 치고 왜성을 쌓아 1년간 이곳에 주둔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곳을 ‘왜장터’로 불렀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뒤 제국주의 침략자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한론의 선구자로 기리며 이곳을 자신들의 성역처럼 여겨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남산 개조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을 모시고 싶어했다.

1892년(고종 29년) 일본 거류민들은 남산 북쪽 기슭에 태양의 신,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궁을 세우기로 계획했다. 먼저 1897년 3월17일 일본 공사는 조선 정부와 교섭해 공원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예장동 일대 3천여 평을 영구 임차했다. 그해 7월 이를 ‘왜성대(倭城臺) 공원’이라 명명하고 도로를 만들고 벚꽃을 무려 600그루나 심었다. 이곳에 뿌리박은 벚꽃처럼 자신들도 이 땅에 대대로 뿌리박을 심산이었다. 이듬해 일본 거류민은 본토의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사람을 보내 신궁사청에서 이른바 신체(神體)를 일부 떠받들어 돌아왔다. 결국 1898년 그 자리에 남산대신궁이 들어섰다. 한양의 수호산이 일제 침략의 교두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훗날 조선신궁이 만들어지자 남산대신궁은 1923년 이름을 경성신사(京城神社)로 바꿨다. 경성신사는 개축 발의가 있어서 10여만원의 기금으로 다시 짓고 1929년 9월25일 천좌식(遷座式)을 가졌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국토경영시조(國土經營始祖)인 국진신(國津神), 조선국혼신(朝鮮國魂神)이라고 하던 대사귀신(大巳貴神), 그리고 소언명신(少彦名神) 등 넷의 신체를 모시고 조선을 영원히 자신의 땅으로 지켜주기를 일본 귀신들에게 빌었다.

남촌 50개동 가운데 30개동이 일본인 마을로

신궁과 신사의 건립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맞물려 진행됐다. 예장터와 그 주변 일대에는 일제의 각종 침략 기구들이 자리잡았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 총본부라 할 일본공사관과 조선통감부가 예장동에 자리를 틀었다.

애초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 옆, 즉 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청수관을 사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일본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일본으로 도망가고 청수관은 불타버렸다. 같은 해 8월 군사를 이끌고 다시 나타난 하나부사 공사는 성 안으로 들어가 남산 밑 금위대장 이종승(李鍾承)의 집을 공사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부근 수십 호의 민가와 장악원의 건물을 징발해 사병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그 뒤 일본공사관은 다시 교동 박영효의 집을 거쳐 남산 기슭에 있던 녹천정(鹿川亭) 자리로 갔다.

경복궁 앞에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위 사진 점선 안·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왼편 위쪽에 명동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서울 충무로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일제 식민지배 시절 공포의 상징이던 헌병대본부가 자리잡고 있었다(아래). 사진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경복궁 앞에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위 사진 점선 안·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왼편 위쪽에 명동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서울 충무로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일제 식민지배 시절 공포의 상징이던 헌병대본부가 자리잡고 있었다(아래). 사진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1905년 일본은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뒤 예장동에 통감부 청사를 설치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일본공사관이 있던 녹천정은 통감관저로 바뀌었다. 본디 이곳은 ‘청학동’이라 불렸다. 푸른 학과 더불어 신선이 사는 곳 아니던가.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하여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사는 욕심 없고 깨끗한 곳, 연산·중종 때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절의가 높고 시문이 도도했던 청학도인 이행(李荇)의 집터가 있던 곳 아니던가.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공사관과 총독관저가 자리잡고 그 경내에 일본군사령부(한국주차군사령부)가 들어섰다. 이 때문에 청학동은 당시 사령관이자 훗날 제2대 조선 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의 이름을 따 ‘호도원’(好道園)으로 불렸다. 플라자호텔 옆 소공동은 훗날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됐으니, 이 또한 침략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930년대 김광균의 시 ‘장곡천정에 내리는 눈’에 나오는 그 장곡천정이다.

을사조약 이후 예장터의 통감부 청사를 시작으로 지금의 제일은행 지점 자리에 경성이사청(일본공사관이 바뀐 것)이 들어서고,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던 장악원을 허물고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섰다. 옛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이자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이 들어선 터에 헌병대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년대 일제의 이른바 무단통치 아래 가장 무시무시한 탄압 기구가 헌병대였다. 이들은 경찰 역할을 겸해서 조선인을 단속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탄압의 최선봉에 섰다. ‘군인 위에 헌병이 있다’고 하던 시절 헌병사령부 앞은 조선인은 감히 지나가기도 어려웠다. 주변 일대는 남산골 샌님 대신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망국 전 한말의 뜻있는 선비 황현은 (梅泉野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왜국의 사신 미야모토(宮本守一)가 녹천정에 들었다. 그 정자가 남산 주동(注洞) 마루턱에 있는데, 소나무가 우거지고 샘과 돌이 그윽하였다. 녹천정은 일찍이 한확(韓確)의 별장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전 판서 김상현(金尙鉉)이 살았다. 미야모토가 마침내 이 정자를 빼앗아 일본공사관으로 삼은 후로 일본인들은 야금야금 주동·나동(羅洞)·호위동(扈衛洞)·남산동·난동(蘭洞)·장흥방(長興坊)과 남쪽으로는 종현(鍾峴)·저동(苧洞)을 가로지르는 진고개 일대를 점거하여, 남촌 50개 동 가운데 30개 동이 온통 일본인 촌이 되었다.”

1906년에 설치한 경성이사청은 예장동 주변을 경성공원으로 만들고, 남산식물원 자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회현동 일대에 30만 평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무상 임대해 1908년 한양공원으로 정하고 1910년 5월29일 개원했다. 퇴위한 고종은 칙사를 보내 치하했다. 허울 좋게 ‘한일공동공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남산 북서쪽 사면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조선신궁(현재 남산 식물원 일대)의 전경과 입구 모습(위).

남산 북서쪽 사면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조선신궁(현재 남산 식물원 일대)의 전경과 입구 모습(위).

일제는 1916년부터 동쪽의 장충단, 남쪽의 성곽 밖, 한양공원, 왜성대공원 등을 포함하는 대삼림공원으로 벨트 라인을 만들고 그 안에 일본 통치의 상징이자 정신적 구심인 조선신궁을 세우려 했다. 1918년 조선신궁을 현재 남산식물원 일대에 건립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면서 한양공원은 폐쇄됐다. 남산 상선대를 무지막지하게 깎아버린 것도 이때였다. 1925년 조선신궁이 완성되면서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國祀堂·서울타워 언저리 성벽 안)은 인왕산 서쪽으로 쫒겨났다. 국사당은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악(북악)을 진국백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아 남산에 목멱신사(木覓神祠)를 두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신궁 세워 ‘식민통치의 성지’로 둔갑

384개의 돌계단을 비롯해 웅장한 참배로가 있는 조선신궁은 조선인의 영혼마저 일본 천황을 위해 갖다 바쳐야 하는 곳이었다. 1939년 일제는 신궁 입구에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탑’을 세웠다.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 서약이 곧 황국신민의 서사다. 식민지 게이조(京城)에 사는 조선인과 학생들은 주요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 의무적으로 동원되어 황국신민서사탑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외어야 했고 신궁에 의무적으로 참배해야 했다. 학병·징병·징용으로 끌려가는 조선인들도 이곳에 와서 참배를 강요당하고 끌려갔다. 남산에서 가장 조선인의 한이 깊게 서린 곳이다.

그 밖에도 남산에는 러일전쟁의 일본 영웅으로 치부되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기리는 노기신사(乃木神社) 등 여러 개의 신사와 동본원사 따위의 일본식 사찰이 곳곳에 자리잡았다.

나랏신도 쫓겨나는 판에 장충단인들 무사할 리 없었다. 1900년 9월19일 임오군란과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죽은 관리와 군인을 제사 지내던 곳 장충단도 1910년 폐사되고 1919년 6월 장충단공원이 새로 조성됐다. 이어 가증스럽게도 일제는 1932년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사찰을 짓고 그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붙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일제는 1940년 3월12일 ‘경성시가지계획공원결정고시’를 통해 제1호 공원부터 제140호 공원까지 고시했다. 남산공원은 제9호 공원으로, 35만 평의 남산도로공원은 제132호로, 장충단공원은 제8호 공원으로 지정했다.

“남산에 올라 도성을 보니 가슴이 답답…”

잠시 일제 말기 남산을 상상해보자. 남대문으로 조선신궁 진입로로 올라가 정상에서 남산 기슭과 가장자리를 내려다보자. 조선신궁 앞에 남산공원이, 그 아래 시계 방향으로 동본원사(東本願社), 그 옆에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 일본군헌병대, 정무총감 관저, 장충동 쪽 박문사와 장충단공원, 다시 남으로 굽어 한강으로 돌아가면 서빙고 쪽에 공병대와 기병대, 연병장, 용산 쪽으로 오면서 사격장, 일본군 20사단 보병 제78연대와 보병 제79연대, 야포병대가 진을 치고 있다. 조선의 남산은 제국 일본의 통치기구와 침략기구에 갇히고 신궁에 짓눌려 있다.

길이길이 경사스러운 일들을 끌어들이라고 불렀던 남산의 다른 이름인 ‘인경산’(引慶山)이 무색하기만 하다. ‘한성팔영’(漢城八詠)의 하나인 남산에서 꽃구경하기(木覓賞花)는 어느덧 남산에서 사쿠라 구경하기(木覓賞櫻) 로 바뀌었다. 예로부터 일컫던 ‘남산팔영’(南山八詠)의 북궐(경복궁)을 가로지르는 구름은(雲橫北闕) 어느덧 조선총독부 건물에 묶여버리고, 바위 아래 그윽한 꽃(岩低幽花)은 간 데 없이 사쿠라꽃이 헤살거리며 흘러간다.

정신 맑은 자라면 그 누가 남산을 올라가 즐거우랴. 일본말만 쓰도록 강요당한 식민지 말기 남산에 올랐던 감상을 김병로(1887~1964)는 당시 보성전문학교 강의실에서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남산니 아갔데 가만히 스왔데 장안을 나가메루토 감슴이 답답하단 말야···.”

남산에 올라가서 가만히 앉아서 장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답답하더라는 것이다. 요컨대 남산아 너 평안하느냐, 이 말 아니었던가!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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