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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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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의 개발 빙자한 학대


중턱에 자유센터·국립극장 등 공공시설물 대거 입주…
명당인 외인아파트·하얏트호텔 등은 외국인 휴식처로 전락
등록 2009-11-19 06:36 수정 2020-05-02 19:25


글 싣는 순서
제1부 남산의 역사와 문화
① 근대 이전의 남산
② 일제시대 남산 1
③ 일제시대 남산 2
해방~자유당 시절의 남산
⑤ 군사정권시대 1
⑥ 군사정권시대 2
⑦ 민주화 이후

제3공화국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남산 파괴가 이뤄졌다. 첫 번째 대규모 훼손은 세운상가 개발이었다.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축인 이 지역은 일본인 동네가 들어섰다가 이른바 ‘도시소개대강’(都市疏開大綱)에 따라 철거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어지럽게 버려져 있던 것을 콘크리트 근대화의 표본으로 개발한 것이 그 흉측한 세운상가였다.

이 축은 남산의 직접적인 일부는 아닐지라도 북악과 한강을 잇는 풍수지리 축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서울 전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남산을 지탱하는 동맥 같은 것이었다. 이런 곳을 시멘트 87만 부대와 철근 7천t을 쏟아부어 21만1200㎡(6만4천 평)의 콘크리트 상자로 막아버렸으니 이는 향후 남산 훼손의 비극을 알리는 천둥소리 같은 전주곡이었다.

1994년 외인아파트(오른쪽 위)가 철거되기 전 한남동 쪽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외인아파트와 하얏트호텔(왼쪽 위)에 가려진 남산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한겨레 자료

1994년 외인아파트(오른쪽 위)가 철거되기 전 한남동 쪽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외인아파트와 하얏트호텔(왼쪽 위)에 가려진 남산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한겨레 자료

남산을 ‘반공의 메카’로 키운 군사정부

세운상가가 들어선 것과 비슷한 시기 종남산은 반공주의의 메카로 개발됐다. 제3공화국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아시아 반공의 종주국이 되고 싶어했고 남산을 그 심장부로 낙점했다.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반공자유센터를 짓기로 한 것이다. 결국 장충단 일부와 울창한 녹지 6만여 평을 밀어낸 자리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들어섰다. 원래는 더 큰 복합단지로 계획됐으나 아시아반공연맹 참여국들이 내기로 했던 분담금을 내지 않자 국제회의장을 포기한 결과였다.

그 부지가 왜 하필 남산인지에 대한 답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었다. 오직 왜 남산이면 안 되는가라는 서글픈 역설만이 유효했다. 여기에서 선임자의 중요성, 즉 “쌓인 눈 위에 처음으로 난 발걸음을 뒤따르는 사람이 쫓아 밟게 된다”라는 만고의 진리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적어도 남산에 대한 인식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제3공화국은 최소한의 양심과 미래 비전, 역사의식과 객관적 판단력이 결여된 제1공화국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남산이 안 되는 이유가 없는 한, 국유지였던 남산은 정권 맘대로 쓸 수 있는 내 집 안마당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남산이 안 되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전임자인 제1공화국이 너무도 확실하게 각인시켜놓았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이라곤 전임자의 고마운 횡포를 방패 삼아 남산의 빈 곳을 골라 종횡무진 갉아먹는 무법의 약탈뿐이었다. 재향군인회관과 중앙공무원교육원 등이 장충단 일대에 잇따라 들어섰고 자유센터 코앞에 국립극장이 세워졌다. 남산 본자락에 훨씬 더 깊숙이 칼자국을 낸 것이다.

이런 건물들을 합하면 이른바 ‘신기념비주의의 종합선물세트’를 이루게 된다. ‘신기념비주의’란 2차 세계대전 이후 슈퍼파워로 급부상한 신제국 미국의 정치력을 과시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지어진 대형 공공건축 경향을 일컫는 말인데, 미국의 지배하에 놓인 제3세계 독재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로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갔다. 서양의 고전주의와 근대양식을 콘크리트 거석 구조로 부풀린 뒤 그것을 권력의 힘과 동일시하는 전체주의 양식의 전형이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에서 극우반공주의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실리게 된다. 이런 시설이 하필 남산 기슭을 파고들면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본격화된다.

서울의 심장부를 외국인에게 내준 꼴

종남산의 동쪽 기슭이 포화상태가 되자 남산 훼손은 남쪽으로 옮겨갔다. 어린이회관, 남산공원, 외국인 주거단지, 외인아파트, 하얏트호텔 등이 연달아 들어섰다. 어린이회관과 남산공원은 서울시 전체의 부족한 땅 사정 아래에서 시민을 위한 공원시설을 세운 것이니 최소한의 타당성은 가질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시설은 외국에 남산의 심장, 나아가 서울의 심장을 내준 격이었다. 외국인 단독주택단지·외인아파트·하얏트호텔의 부지는 남산을 배경으로 삼고 한강을 내려다보는, 서울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당이자 심장부이다.

외국인 단독주택단지는 하얏트호텔에서 남산체육관 사이 10만2300㎡(3만1천 평)의 경사지에 50채로 이루어진 단지였다. 소월길 위쪽으로 울창한 숲 속에 남향을 받으며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으니 서울 시내에서 이런 입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던 명당 중 명당이었다. 이 단지는 동쪽으로 외인아파트 두 동으로 이어지며 절정을 이룬다. 1972년에 16층·17층의 고층 아파트로 완공됐는데 높이로나 시설로나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건물이자 아파트였다.

이 두 곳은 당시로서는 서울 시내의 별천지였다. 이 일대만 지나가면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외인아파트보다 더 깊은 숲 속에는 미8군의 종교휴양시설이 들어 있다. 기도소를 중심으로 한 산림 속 휴양시설이다. 단독주택단지와 외인아파트는 현재 식물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지금도 축대가 많이 남아 있다. 경사진 부지에 단독주택을 짓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경관을 가장 해친 것은 하얏트호텔이었다.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일본 자본이 들어와 5년만인 1978년에 준공됐다. 무려 106m의 둥근 원호가 남산을 병풍처럼 막고 서 있다. 한남대교를 넘어 강북으로 들어오는 길에 남산타워와 함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다. 정작 남산은 눈에 안 들어오고 두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아마도 남산을 ‘학대’하고 있는 형국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강북 쪽으로 조금 더 진입하면 외인아파트까지 가세해서 남산 학대의 절정을 이룬다

능선 하나 파내는 데도 신중을 가해야 하는 법인데, 그 전형을 남산에 해댔으니 이를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더욱이 그곳이 서울의 심장부인데, 이런 곳을 식민지에서 탈피한 지 30여 년이나 지난 뒤 외국인들에게 자진 납부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외국인을 위한 시설, 특히 고급 시설이 필요한 것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왜 하필 그곳이 남산의 남쪽 자락이어야 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외인아파트와 하얏트호텔은 향후 전개될 능선 파괴의 교본이었다. 두 건물이 완공된 때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아파트는 거의 5층짜리였다. 고층 아파트는 그 수도 적었을뿐더러 압구정동 같은 평지에 지어졌다. 이런 시절, 남산을 파헤치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서울 시민들은 건물을 저렇게도 지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산도 저렇게 했는데 다른 곳의 이름 없는 능선쯤은 아무리 파내고 훼손한들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연에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흉악한 인식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격이었다.

박정희는 국토 전체에 대해서는 자연보호와 산림녹화를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벌거숭이로 벗겨진 전국의 산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가꿔 지금의 푸른 숲을 일군 주역은 분명히 박정희였다. 그러나 유독 남산에 대해서만은 잔혹하리만큼 훼손을 했다. 순수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근대화에 따라 각종 공공시설을 지어야 하는 필요성은 급박했을 것이다. 돈도 땅도 없는 상태에서 남산은 제일 먼저 털어 쓸 수밖에 없는 저금통으로 인식됐을 터다. 여기까지는 최소한의 상식적 논쟁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흔히 얘기하는 개발론 대 보존론의 논쟁 대상이 될 수 있다.

산림녹화 내세웠지만 유독 남산엔 잔혹

문제는 외국인 시설과 중앙정보부 건물이다. 이는 개발론에서 허용될 수 있는 진정성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만행이다. 여기에서 박정희의 이중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근대화에 대한 그의 충정은 이해되지만 그에게 최우선 순위는 국가 근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독재권력 유지였다는 이중성이다. 남산에 가한 학대를 보면 단순히 역사인식이나 문화의식이 없다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안 된다.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은 총동원했으며 남산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공과(功過) 논쟁에서 과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차지하는 데 안타깝게도 남산이 그 중심에 있다.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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