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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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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자유당 시절 국회의사당 이전 추진에 좌우익 집회장으로도 활용, 음독자살·화재도 많아
등록 2009-11-06 01:40 수정 2020-05-02 19:25


글 싣는 순서
제1부 남산의 역사와 문화
① 근대 이전의 남산
② 일제시대 남산 1
③ 일제시대 남산 2
④ 해방~자유당 시절의 남산
⑤ 군사정권시대 1
⑥ 군사정권시대 2
⑦ 민주화 이후

1959년 8월25일 오전 10시께 남산 인근에 사는 부녀자 30여 명이 호미와 삽을 들고 남산의 한 공사장에 몰려갔다. 당시 주민들은 서울시 과학관 자리에서 공사 중인 육군 공병대와 충돌했고 공사는 중단됐다. 주민들은 공사로 인해 길이 막히면서 남대문시장을 다니는데 큰 불편을 겪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앞서 5월 말부터 주민들이 서울시와 국회사무처에 항의를 해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는데, 비가 오는 틈을 타 공사가 다시 시작되자 부녀자들이 나와 항의를 한 것이었다.

좌익에서 우익의 정치 집회장으로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이승만 대통령 동상.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 동상은 몸통 길이가 23.5척, 축대 높이를 합하면 81척으로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었다. (중략) 동상 건립에 필요했던 3억환가량의 자금은 전국 극장 입장권에 10~20환씩의 경축금을 부과해 해결했다”고 밝혔다. 동상은 1960년 4·19혁명 뒤 발파작업 끝에 해체됐다. 이승만의 호를 따 지었던 남산 정상의 우남정 또한 4·19때 파괴됐다가, 1968년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일제시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이승만 대통령 동상.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이 동상은 몸통 길이가 23.5척, 축대 높이를 합하면 81척으로 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이었다. (중략) 동상 건립에 필요했던 3억환가량의 자금은 전국 극장 입장권에 10~20환씩의 경축금을 부과해 해결했다”고 밝혔다. 동상은 1960년 4·19혁명 뒤 발파작업 끝에 해체됐다. 이승만의 호를 따 지었던 남산 정상의 우남정 또한 4·19때 파괴됐다가, 1968년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러한 시위의 근본 이유는 서울시청 맞은 편(현 서울시의회)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남산으로 옮기기 위한 공사의 강행이었다. 국회의사당 신축을 위해 1959년 3월 중순 신축 부지의 나무들을 이승만 대통령 동상 뒤쪽으로 이식했고, 같은 해 7월부터 육군 공병대를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공병대는 1960년 6월 말까지 1차 공사를 끝낼 예정이었고, 건설 책임자들은 의사당 건립에서 한국의 전통적 축성 방식을 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남산공원 자리에 의사당을 신축하고 장로교신학교 자리에 국회사무처 청사와 도서관 등 부속건물을 짓는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청사진도 나오지 않은 채 졸속으로 공사가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도로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채 진행됐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도시 서민들의 ‘폭력’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만약 남산에 국회의사당이 건립되었다면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서울 남쪽의 복잡한 주거지와 상가·유흥가 단지로 둘러싸여 있던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에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8·15 해방 직후 남산에서는 좌익 정치세력들의 정치 집회가 자주 개최됐다. 1946년의 3·1절 기념식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해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행사였음에도, 반탁운동과 모스크바 3상협정 지지로 나누어져 있던 좌우익 세력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했던 것이다. 남산에서 행사를 마친 좌익 세력들은 남대문과 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화신백화점 등으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29일에는 모스크바 3상협정 1주년을 기념하는 좌익 정치인들의 집회가 남산에서 열렸고, 이듬해 3·1절 기념식이 또 거행됐다. 그런데 1947년의 3·1절 기념식 때는 식후 남산에서 내려오던 좌파 그룹과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향해 행진하던 우파 그룹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경관의 발포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수도경찰청은 괴한들이 남조선노동당 본부가 있던 남대문 근처의 한 빌딩 옥상에서 우익 학생들을 향해 발포했는데, 이들이 노상에 낙하시킨 보자기에 소련 국기가 그려진 소련군표가 있었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이 좌파에게 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5월1일 메이데이 행사가 남산에서 개최됐는데, 행사 참여 학생 200여 명에게 퇴학 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그해 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더 이상 좌파 그룹들은 남산에서 공개적으로 집회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남산은 이제 우파 그룹들의 행사장이 되었다. 대동청년단의 창립 1주년 기념식이 1948년 9월19일 남산광장에서 진행됐다. 1949년 8월9일에는 경찰관과 민보단(사회통제를 위해 조직된 준경찰조직)의 합동전투훈련 장소로 삼청공원과 함께 남산공원이 이용됐다.

남산이 훈련 장소로 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과 달리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산 주변 지역은 비밀 아지트로 이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두한의 대한민족청년단 본부였다. 대한민족청년단 본부는 남산의 옛 동본원사 자리에 있었는데, 1947년 4월20일 수도경찰청이 돌연 이 본부를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주검 1구와 부상자 10명을 발견했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우익 청년단체의 안가가 있었기 때문에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기 위해 만났을 때 자신이 ‘남산’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던 것일까. 역설적이게도 김구가 암살된 직후 그 추종자들은 남산에 김구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우익단체 아지트도 들어서

남산 주변에는 유흥가들이 밀집해 있었다. 서울시는 1946년 12월 일제강점기 유흥가로 쓰였던 건물 26채 중에서 13채의 요정을 개방하고 여기에 2460명의 전재민을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흥가에 대한 르포가 1950년대 초까지 가끔 신문지상을 오르내렸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남산공원은 다양한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매년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한 한-미 합동 예배가 남산에서 열렸다는 점이다. 이미 1946년 각파 기독교회들은 남산의 조선신궁 자리에 기독교박물관을 세우고 연합예배당을 신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953년 정전협정이 조인된 이후 부활절 행사가 한-미 합동으로 남산공원에서 매년 개최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남산에 있는 자신의 동상 옆(현 백범 광장)에 국회의사당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공사는 유아무야되고 말았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남산에 있는 자신의 동상 옆(현 백범 광장)에 국회의사당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공사는 유아무야되고 말았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종교의 성지? 이승만의 성지?

1954년 4월17일 ‘촛불예배’로 시작된 부활절 행사는 이튿날 새벽 5시30분 테일러 주한 미8군 사령관과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한 부활절 행사로 이어졌다. 이후 1955년 4월11일 부활절 행사에는 정일권 참모총장과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참석했으며, 1950년대 말까지 부활절마다 새벽 5시30분에 이승만 동상 앞에서 부활절 행사가 계속됐다. 당시 남산은 골고다 언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남산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승만 동상이 들어서면서였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대통령의 약사(略史) 편찬 기념도서관, 기념체육관, 육영재단 건립 등을 추진하던 ‘80세 탄신경축위원회’는 행사의 일환으로 1955년 10월3일 개천절에 이승만 동상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광복절에 완공식을 가졌다. 이 동상의 제작에는 2억6056만환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이는 당시 공식 환율로 계산하면 52만달러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매년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정부 재정과 국방비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 정부로서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면 왜 이승만의 동상을 남산에 세우려고 했을까? 이승만은 1950년 3월26일 76회 생일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남산 지역에 대해 얘기했는데, 단지 그가 남산 근처에 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족운동의 상징이던 김구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던 것처럼 남산은 서울의 상징이면서 한반도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59년 11월13일 남산의 팔각정 단청을 완성하고 이름을 이승만의 호였던 ‘우남정’으로 붙였다.

그러나 당시 남산의 실상은 ‘성지’가 아니었다. 서울 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산에서 음독자살했다. 1958년 8월5일에는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느니보다는 깨끗이 죽는다’는 유서를 서울시장과 서울시경국장에게 보낸 뒤 자살 미수에 그친 한 제대군인도 있었다. 1958년 11월1일에는 헌병대 소속 하사관이 음독자살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남산의 으슥한 곳에서는 변사체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의 상징’ 이면엔 서글픈 삶들이

남산 일대에 도시 서민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도 있었다. ‘남산동 변소사건’으로 알려진 1954년 6월의 일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임신 7개월의 김송열씨는 지나다니는 데 불결하고 불편하니 변소를 허물라는 이웃집(판사)의 요구를 거절하고, 경찰이 변소를 허물자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그런데 그 구속이 너무 가혹하다 해서 6월17일 석방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서민들이 많이 모여살았기 때문에 남산에는 산불도 자주 일어났다. 1950년대 초에는 벌목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1953년 이후에는 산불이 심심찮게 일어났고, 1959년 5월부터 1960년 1월 사이 산불이 집중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남산이 하나의 상징이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내무부에서는 1954년 9월 남산공원과 장충단공원을 묶어서 현대적 대공원 설립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최초의 ‘재개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주택도 못 짓게 하고 학교와 교회도 철거하려고 했다. 물론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남산은 누구의 성지도 아니었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중심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 발가벗겨진 모습이 해방 공간과 1950년대를 통해 보여졌던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한국사


남산 남서쪽 기슭 ‘해방촌’
솔밭에서 월남민 모여사는 달동네로


‘해방촌’은 글자 그대로 8·15 해방 뒤 생긴 마을이다. 법정 명칭은 서울 용산구 2가이고, 행정동으로는 용산 2가동에 속한다. 용산 2가동에는 용산 2가와 더불어 용산 4가까지 포함돼 있다. 기슭을 내려온 평지에 조성된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 용산 4가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성저십리에 속해 한성부가 관할한 지역으로, 인가가 드문 솔밭이었다. 갑오경장 때까지만 해도 왕실과 문묘의 제사에 쓸 황소·양·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暑)가 있었다. 일제는 남산의 북쪽과 서쪽 사면 기슭을 따라 각종 신사와 권력기관들을 배치시켰지만, 능선 너머의 남쪽 기슭은 크게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이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산림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 1946년께부터 북쪽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자리잡게 되면서 생겨난 마을이 곧 해방촌이다. 1945년부터 월남한 사람들은 당시 비어 있던 일본의 육군관사(한때 육군형무소)를 집단적으로 점거해 살기 시작했다. 이 관사들은 필동 2가에 있던 일본 주둔군사령부가 1908년 용산에 새로 건립된 청사로 옮겨오면서, 현재의 용산고 남쪽으로 길을 따라 대규모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람들이 무단으로 육군관사에 들어와 살자 퇴거명령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군정은 건물을 뜯어가도 좋으니 관사 터는 비워줄 것을 다시 요구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1946년 미군은 이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이렇게 해서 쫓겨난 사람들이 현재의 해방촌 중 윗동네(이태원 쪽, 초기의 용산동)에 터전을 잡았다. 해방촌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약간 아래쪽(후암동 쪽, 초기의 신흥동)에 또 하나의 거주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착자는 대부분 평북 선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선천은 기독교 선교가 일찍이 시작된 덕택에 기독교인이 많고, 또한 광산이나 해상무역 등으로 자산가들이 많던 지역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선천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주의 통치에 자연스럽게 반발했고, 이를 피해 남쪽으로 대거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들 중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교회 맞은편에 천막을 치고 살기 시작했다. 거주자가 점차 많아지자 이들은 1947년 사회부 장관과 교섭해 임시 천막 40여 개를 얻어 지금의 해방촌 자리에 정착했다. 이때 정착한 사람들은 400여 가구에 달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곳은 바로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였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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