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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특강-배신] 배신은 ‘심리적 퍽치기’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배신의 정신분석’으로 청중의 마음을 치료해준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글 김민 15기 독자편집위원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제5회 인터뷰 특강-배신 ②

‘지난주보다 사람들 많이 안 와 있겠지?’ 하고 들어선 강연장. 예측은 빗나갔다. 저녁 7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빈자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회자인 배우 오지혜씨도 놀랐는지 “이렇게 많이 찾아오실 줄 몰랐는데 아마도 배신을 당한 기억이 많으신가 봅니다. 카운슬링 받으러 오신 건 아니죠?”라고 장난스럽게 운을 뗐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 정혜신씨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리고 간간이 빔 프로젝터로 쏘아올려지는 영상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마치 집단 심리치료를 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지혜(이하 오): 요즘 기업인들의 정신건강 컨설팅을 한다는데, 정신건강 상담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정혜신(이하 정): 보통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신건강 컨설팅은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신건강’에 주목한다.

오: 기업인들을 상대하는 데 특별히 힘든 점은?

정: 제 아무리 최고경영자(CEO)나 대통령이라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일반 사람들과 같다. 결국은 비슷한 정신적인 문제를 가졌다.

정혜신씨는 장진 감독의 영화 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강연을 시작했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가 속으론 분노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장면.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여자보다 남자의 상황에 쉽게 감정이입된다. 사람들 마음에 그만큼 배신을 당한 기억이 많다는 뜻이다.

배신은 심리적으로 거래가 불가능한, 완벽하게 일방향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범죄로 비유하면 ‘퍽치기’에 가깝다. 퍽치기는 일말의 타협의 여지도 없는 범죄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방향적인 관계에서 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이런 점에서 배신은 ‘심리적인 퍽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베이식 트러스트’(Basic Trust)라는 개념으로 배신의 고통을 설명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베이식 트러스트가 생겨나야 한다. 베이식 트러스트는 보통 생후 2~3년 안에 생성되는, 세상에 대한 신뢰감이다. 배신을 당했을 때 내가 ‘쿨’하려고 노력해도 통제가 안 되는 이유는 배신이라는 감정이 베이식 트러스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이건 변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는 일종의 ‘지지벽’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게 무너질 경우 사람들은 정신적인 공황을 경험한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인간관계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지지벽을 세워두고 상대방에게 그에 걸맞은 행동을 일방적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배신당하는 감정을 자주 느낄 가능성이 높다. 헌신적인 부모, 희생적인 연인,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상사가 이런 상황에 빠지기 쉽다.

배신과 관련해선 수동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는 반면 타인의 행동은 현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필요하게 배신을 당했다는 감정이 생겨난다.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흔한 대사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배신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우리가 배신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에는 무늬만 배신, 즉 ‘유사 배신’이 많다. 배신당했다, 뒤통수 맞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그것이 진짜 배신인지 분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태까지 내 행동은 동기부터, 남의 행동은 현상부터 보아왔다면 내 행동은 현상부터, 남의 행동은 동기부터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배신의 과잉을 해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더불어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박수)

사회적 배신감은 ‘해결해아 할 문제’

강연이 끝나자 청중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배신’의 질문을 쏟아냈다.

청중1: 자기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바람을 피운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배신감을 느낄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정: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로 합리화가 일어난다. 만약 이런 방어 기제가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청중2: 살다 보면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도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가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는 유사 배신인가?

정: 사회적으로 겪는 배신감의 경우, 배신의 구체적인 경험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심리적 문제라기보다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밤 9시가 훌쩍 넘어 강연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진료 잘~ 받았다’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강연장을 나서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아 참, 이건 진료가 아니라 강연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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