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제1620호 표지
제1620호를 발행하고 이번호를 제작하는 사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가자 전쟁) 1천 일(2026년 7월2일)이 지났습니다. 가자 전쟁을 숫자로 헤아리는 건 그곳의 시간이 ‘흐름’이 아니라 만기 없는 ‘적립’임을 암시합니다.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도 그렇게 쌓여갑니다.(이번호 ‘뉴스 큐레이터’ 참조) 그러나 이것은 외부인의 시선인지 모릅니다. 가자 시민들에게 시간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무한 반복되는 ‘타임루프’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더 정확한 건 ‘나선형 소용돌이’입니다. 매일같이 겪는 굶주림과 피폭, 죽음조차 현상유지는커녕 갈수록 악화하며 나락으로 끝없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해초(본명 김아현)의 항해는 국제 구호선단 항해자들과 함께 가자의 시간을 나선형 회오리에서 흐름으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그들의 시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기세등등합니다. 제1620호 표지이야기 기사에 붙은 댓글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가 돈 들여 구조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에 유독 눈길이 갑니다. 가자의 참극을 화폐에 기입된 숫자로 가리는 잔인한 말입니다. 그러니 집단살해 점령군과 정치권력을 언급하는 일은 없습니다. “실정법을 지키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말은 이성의 포즈를 취하기에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은유마저도 전쟁통에 죽어버렸다.”(‘완벽한 피해자-팔레스타인인이라는 존재’, 모함메드 엘쿠르드 지음, 박종주 옮김, 마티 펴냄) 적립이니, 타임루프니, 나선형 소용돌이니 하는 비유마저 뜨끔해지게 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간접성의 표현 방식입니다. 저 말은 가자 전쟁에 접근하는 그 어떤 간접성의 방식도 가치나 쓸모를 기대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읽힙니다. 해초와 동료들의 ‘항해’는 은유가 아닙니다. 유일한 평화주의적 직접행동입니다. 현재 인류의 가장 잔혹한 만행 앞에서 ‘다른 방법’과 ‘간접행동’은 이음동의어처럼 들립니다. 안타깝지만 날짜와 희생자 수로 기록하는 우리의 보도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자연법칙의 시간, 즉 흐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도래하는 선택의 순간, 즉 실행의 시간입니다. 해초와 동료 항해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항해한 이유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통과해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가자고 전세계 시민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혹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귀’(최승자, ‘무제 1’)를 가진 건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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