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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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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치료할 수 없을 때의 위로

등록 2025-06-05 22:27 수정 2025-06-13 08:31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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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느 겨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드문드문 연락을 주셔서 몇 번 찾아뵈던 환자가 있었다. 40대 여성, 말기암 환자로 어린 자녀 둘이 있었다. 남편이 전화로 진료를 의뢰하며 아내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기를 부탁했다. 환자는 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는데, 나는 중간중간 필요한 약 처방이나 상담을 위해 집을 찾았다. 아이들은 주변을 맴돌았고, 환자는 지친 기색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공간엔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환자 상태를 겨우 살피고, 갈 때마다 환자의 어머니께서 내주시는 과일을 말없이 먹었다. 남은 과일을 싸주셔서 감사하다며 받아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부음 듣고도 곧장 또 다른 집을 향해

3년여 인연이 이어졌는데, 남편에게서 마지막 문자가 왔다. 아내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하다며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하다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그 문자를 받고 곧장 또 다른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생의 끝을 함께해야 하는 자리였다. 남편은 20년 가까이 의식 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돌봤다. 5년여 인연을 이어오며 남편의 무거운 어깨가 마음에 걸렸지만, 쉽사리 어떤 위로도 건넬 수는 없었다. 환자에게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보호자인 남편에게는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예상한 상황이었지만 생의 마지막은 언제나 슬프고 쓸쓸하다. 그날은 왠지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미연(가명)님은 머리에 종양이 있어 조금씩 마비 증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최근 어린 자녀에게도 유사한 문제가 확인됐다고 했다. 남편은 생계를 위해 종일 집을 비웠고, 상황은 좋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로 미연님을 만났다. 그는 씩씩했다. 담담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살폈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견디기 위해 잘 먹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걱정하기보다는 대화를 잘 나눴다. 이전에 받은 처방전이 있길래 약을 처방하면 되겠냐고 물었다. 미연님은 처방전을 받았을 뿐 약국에서 약을 받진 않았고 먹지도 않았다고 했다. 우울증이라고, 신체화장애라고 누군가 진단할 수 있겠지만 미연님은 약에 의지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 했다. 그것을 충분히 존중한다고 말했고, 응원의 마음을 전했다.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지만, 그는 지금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날 대화 이후 잘 먹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그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

작은 위로를 전하기 위해 환자분을 찾아뵙지만, 적절한 말을 끝내 건네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다소 날카로운 말을 무심코 던지고, 뒤늦게 자책하기도 한다. 어설픈 위로를 하려 서두르거나, 섣불리 진단하고 약으로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상황을 받아들이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결국에는 환자와 가족이 헤쳐가야 할 여정이다. 암이란 병은 종종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또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그게 꼭 치료나 약이 전부일 필요는 없다. 치료가 무력해지는 순간에도, 약 없이 충분한 소통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다. 비관하지 않되, 서두르지 않는 태도. 함께 그 상황을 마주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아픈 이들과 그 곁을 지키는 이들에게 소박한 위로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히 골라본다.

 

홍종원 찾아가는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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