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유형을 네 가지로 나눈 ‘호사분면’이라는 그림이 2015년께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문화방송(MBC) 예능프로그램 ‘마이리틀텔레비전’을 제작한 권해봄 피디가 원저자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지 거의 10년째 거론되고 있다. ‘호사분면’이란 일종의 그래프인데, 수평축을 ‘업무 능력’, 수직축을 ‘친절한 정도’로 설정하고 업무 능력과 친절함이 공히 뛰어난 사람을 ‘호인’, 능력도 떨어지고 불친절해 성격도 나쁜 사람을 ‘호로××’, 능력은 출중하지만 불친절한 사람을 ‘호랭이’, 성격은 좋지만 능력은 떨어지는 사람을 ‘호구’라고 한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로××’에게 시달리고 ‘호구’ 때문에 답답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호인’까지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호랭이’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치며 공감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파생된 이른바 ‘밸런스게임’은 흔한 대화 소재가 됐다. 같이 일하는 직장상사나 동료로서 능력 있는 ‘호랭이’가 나으냐, 친절한 ‘호구’가 나으냐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열에 여덟아홉은 ‘호랭이’가 더 낫다고 대답하는 것 같다. 상사나 동료에게 요구하는 자질로 인간 됨됨이보다는 업무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로 성품과 능력을 양자택일할 수 있는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성격이 개차반이면서 그 결점을 양해하고 넘길 수 있을 만큼 업무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현실에 정말 존재할까 싶다. 탁월한 업무를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동료들과의 원만한 소통 능력이다. 불친절함으로 말미암은 일말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은 능률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본조차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실에서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만큼 불친절한 성품으로 모두에게 비호감인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 텍스트에서만 볼 수 있는 인물 유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밸런스게임’에서 ‘호구’보다 ‘호랭이’가 더 낫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예컨대 드라마 ‘셜록’(Sherlock)의 셜록 홈스, ‘하우스’(House, M.D.)의 그레고리 하우스, ‘더 씩 오브 잇’(The Thick of It)의 말콤 터커와 같은 가상의 캐릭터를 상상하면서 대답했을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캐릭터에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도 성격이 친절하지 않을지언정 능력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진다.
타인과의 소통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은 그것 자체로 그 사람의 성품이자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 그 사람의 본질이 어딘가에 따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 사람의 행동과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면의 진의나 진정성을 헤아리고 해량해야 할 이유가 특별한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딱히 없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드라마나 영화, 만화 등에서 접한 캐릭터를 동경하면서 한 사람의 불친절한 언행 뒤에 숨은 어떤 진심이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믿고 있다. 이를테면 배려심도 없고 사회성도 떨어지는데 높은 학력과 학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위악’의 이면에 모종의 선한 의도나 합리적 동기가 있으리라 믿으며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타인에게 친절하며 점잖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선한 외면의 이면에 어떤 불순한 동기, 미심쩍은 속셈, 꿍꿍이가 있지 않은지 의심부터 하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경우도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텍스트의 악역 캐릭터를 대입해 상대를 판단한다. 외면과 속내가 완전히 다른 야누스적인 인물, 겉으로는 매우 선하고 탁월해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지만 속내는 매우 음험하고 뒤틀린 욕망과 음모로 가득해 썩어 문드러진 ‘빌런’ 캐릭터를 상상하면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선하게 보이는 사람도 불순한 동기를 숨기고 있으리라 의심한다. 그러면서 그 누구도 속마음까지 일관되게 선할 수는 없다고 넘겨짚는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대중문화의 가상 인물을 경유해서 상대를 간접적으로 대하는 경향성을 키우고 있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매우 높은 정도의 대상화 혹은 물화를 끊임없이 한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캐릭터에 빗대어 상대를 정형화하고, 정형화한 인물 유형에 맞춰 상대의 행동과 동기를 예상하고 추측하고 기대하며 그에 어긋나는 모습을 목격하면 실망하거나 분개한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이면에 숨은 그 사람의 ‘진정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어떻게든 끄집어내려 한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보면 진정성부터 의심하고 위선으로 받아들이는 식이다. 그 거짓된 선의 외면에 숨은 이면을 기어이 직시하고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비로소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상대를 폭력적으로 대한다. 외면상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그가 가리고 싶어 하는 추한 면이 반드시 있으리라 확신하며 그것을 폭로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믿는다. 이 단계부터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고 할 수 없다.
이러한 폭력적인 대상화와 물화의 문제는 남성이 여성을 대할 때 특별히 심각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대중문화에서 여성 인물의 재현 양상이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유형 역시 극히 제한적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유형화는 간단히 말해 두 개의 극단만이 있었다. 바로 ‘성녀’와 ‘창녀’다. 주로 모성애와 연결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일절 없는 ‘성녀’ 아니면 바라는 바를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으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남성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창녀’ 둘 중 하나로 여성이 묘사돼왔다. 이 이분법은 ‘김치녀’와 ‘개념녀’, ‘페미니스트’와 ‘비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남성들은 이 이분법에 따라 여성을 물화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물화의 시선은 비일관적이다. 예컨대 젊은 여성 아이돌 연예인이라면, 아이돌로서의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그 핍진성을 떨어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정색하거나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기라도 하면 바로 논란거리가 된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지나치게 카메라를 의식한다’ ‘부자연스럽다’ ‘너무 예쁜 척한다’며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기도 한다.
도대체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진정성을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명령’으로 정의하며 이 명령이 현대의 도덕적 이상이 됐다고 말한다. 옳고 그름이라는 일체의 판단 체계는 본래 신과 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로부터 주어졌지만 그러한 과거의 도덕적 지평으로부터 단절함에 따라 내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오직 내 마음속에서 찾아야 하게 됐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오직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현재 속한 공동체와 시대의 상황과 맥락, 도덕관 등을 일절 무시한 채 진정성을 희구하면 극단적인 원자화와 파멸만을 초래할 수 있음을 테일러는 경고하며 반드시 타인과의 소통 안에서 진정성을 희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과의 소통을 대중문화를 경유해 간접적으로만 하는 경향 아래서 진정성만 희구하다가는 테일러가 경고한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시대의 맥락과 도덕을 무시한 채 진정성만 찾는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순간은 성욕과 배변욕이 동할 때뿐이다. 그렇기에 여성을 극단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들은 여자화장실 불법촬영 영상을 만들고 소비하며 인간 여성의 ‘본질’을 완전히 파헤치려 한다. 그래야만 여성을 완벽하게 물화함으로써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소비하는 데로 이어졌다. 아는 사람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해 그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응시하는 것을 넘어 성적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상당수 가해자와 피해자가 십 대라는 사실이 특히 더 충격적이다.
과연 김민하 시사평론가가 그의 블로그에 쓴 대로 ‘세상이 포르노다’.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타인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대중문화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대면할 수 있게 되는 가운데, 상당수 남성은 여성들을 포르노를 통해서만 대면하고 있다. 현실에서 현상으로 보이는 상대의 말과 행동의 형식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고 거짓이자 기만이며 그 밑에 은폐된 ‘진정성’만이 본질이고 진실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든 타인들을 발가벗기려 달려들며 그래야만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신 역시 만인 앞에서 팬티를 내리며 당당하게 추태를 부린다. 작금의 이러한 문제만큼 소통의 완벽한 실패를 노정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말 그대로 공동체의 붕괴가 아닐 수 없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김내훈 칼럼니스트의 칼럼 ‘행재요화’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하신 필자와 열독해 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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