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한국 공포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푸근한 인상의 가수 겸 중견 배우가 사이코패스 의사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됐지만 평은 매우 안 좋았고 흥행도 참패했다. 단지 잔인한 연출과 기괴한 스토리로 어설픈 공포를 유발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주인공 배우 본인도 출연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나는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흥행은 참패해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이 완전히 잊혔지만, 나로서는 10년째 이따금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13년 어느 날, 한 고등학교 동창이 소셜미디어에 영화 감상평을 올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다. “이 영화 절대 보지 마라. 최악이다. 너무 무섭다.”
나는 감상평을 보고 너무 궁금해서 동창에게 댓글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이 영화 무섭다고 홍보한 것을 보고 무섭겠다는 기대를 하며 공포영화를 보러 갔을 텐데 너무 무서워서 최악이라고? 이해가 안 된다.” 여기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너무 무서워서 기분이 나쁘더라.”
잘 만든 공포영화의 무서움과 기분만 나쁜 공포영화의 무서움은 당연히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잘 표현할 방법을 모르면 내 동창의 댓글 같은 이상한 혹평이 나온다.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까, 다만 마음속에 새겨진 ‘무서움 → 기분 나쁨 → 나쁜 영화’라는 공식을 일차원적으로 표현하면서 ‘무서워서 비추(비추천)하는 공포영화’라는 황당한 명제가 탄생했다.
사실 나에게도 약간은 반성하게 한 일화였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할 수 있는 말이 지극히 한정적이다. 이거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대박이다. 지루하다. 영화가 됐건 음악이 됐건 다양한 문학적 수사를 다듬어가며 텍스트가 유발하는 감응, 그리고 그것을 접했을 때 내 감정 변화가 어떠한지 등을 자세히 기술할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부럽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을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에 나는 매우 서툴고 어색하다. 요즘 들어 흔히 보이는, MBTI(성격유형검사)를 세속적으로 수용하며 과몰입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전형적인 T형 인간’이라고 할 듯하다.
유행어처럼 일컫는 ‘T형 인간’은 ‘감수성이 메말랐다’라는 말의 ‘요즘 식’ 대체어다. 감수성에 대한 대중의 세속적인 이해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물 캐릭터 웨이드처럼 약간의 자극만 있어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전형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혹은 환경·기온·습도의 변화나 개인이 처한 상황,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기분이 큰 낙차로 바뀌며 잘 웃다가도 쉽게 화내는 사람에게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 표정 변화가 작은 사람에게는 감수성이나 감성적이란 말이 잘 붙지 않는다. 나는 이 감수성에 대한 세속적인 이해를 반대로 해석해보고 싶다.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이다. 눈·코·입은 팔다리만큼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얼굴은 못 움직이는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발달시켰다. 바로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 기능을 한다. 현재 내 기분과 감정을 표정 변화로 남에게 드러내고 이해시킬 때 의미가 있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가 비로소 얼굴이 되는 것이다.
생물체가 진화하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간극이란 외부로부터 신체가 받아들이는 자극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지기까지 경로와 시간을 말한다. 신경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생물체의 운동은 바깥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일부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간다. 모든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대신 일부는 무시하고 일부는 약간의 지체를 두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지체에서 나름의 판단과 생각이 발생하며 이것이 곧 마음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면서 발생하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극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된다. 다만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생존에 유리하고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위험한 환경에 있거나 신체 조건이 그러한 생물체는 이 경로를 더 길게 형성하지 않는다. 곤충이나 파충류, 야생동물이 그렇다. 경로가 단순한 벼룩이라면 거의 모든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즉시 튀어오른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건드리면 도망가거나 사지를 휘두르지 않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판단하기 위해 뒤를 돌아서 누가 자신을 건드렸는지 확인부터 한다. 건드린 사람이 지인임을 알면 경계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지인이 아니라면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말없이 계속 툭툭 친다면 어떻게 될까? 성질이 급한 사람은, 혹은 자극에서 반응으로의 경로가 비교적 단순하고 짧은 사람은 바로 공격성을 드러내며 손과 팔을 이용해 그를 밀칠 것이다. 경로가 길고 복잡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도 공격성을 드러내기를 참을 것이다. 몸과 사지는 가만히 있는 대신 얼굴은 붉어지고 일그러지며 미간에는 주름이 생기고 콧구멍은 커진다. 이렇게 표정으로써 분노의 표시를 대신한다.
외부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까지의 프로세스에서 일어나는 신체 변화의 해석을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돼 식별 가능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얼굴로 타인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소통한다.
인간의 소통에서 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것이 중요한 만큼 당연히 언어의 중요성은 더 강조돼야 할 것이다. 유년기 이후 표정이나 기타 등등의 몸짓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때와 장소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에, 언어로써 점잖게 설명하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특히 젊고 어린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점잖고 고상하게 설명하고 표현하며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충분히 훈련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들은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 그런 능력을 훈련할 기회조차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 이른바 감수성 교육은 예체능 실기 교육이나 (‘젠더 감수성’ 같은 용례의 맥락에서) 인권교육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영화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어떤 대중문화 텍스트를 함께 접하고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 감수성 훈련의 출발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좋으면 왜 좋은지, 안 좋으면 왜 안 좋은지 친구에게 부족한 어휘력으로라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텍스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상을 남과 공유하려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텍스트를 접한 뒤 감성의 자극으로 말미암은 감정 변화를 의식적으로 성찰해야 타인과 말로써 공유할 수 있는 느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찰의 산물로서 느낌을 남들에게 설명하고 듣는 과정을 장기적으로 반복하다보면 자기 감정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나의 그것과는 다른 타인의 감상에 대한 수용력과 이해력도 높아질 수 있다.
한국 학생들에게 이런 훈련을 받을 시간이 충분히 허락되는지 의문이다. 공교육의 의의가 수능 점수 높이기, 상위권 대학 진학으로 수렴되는 이상 감수성 교육은 시간 낭비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예체능 시간은 관련 전공 지망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율학습 시간으로 쓰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감정 상태, 어떤 감상을 어설프나마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이른바 ‘중2병’으로 희화화되고 조롱 대상이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점점 더 많은 영유아가, 손에 스마트폰이 쥐여지면서 느낌을 주고받고 동일시할 매개체로서 타인의 얼굴을 볼 시간이 심하게 줄어든 채 성장한다는 점이다. 비언어적으로 느낌을 공유하고 소통할 창구인 얼굴이 차단된 채 성장하는 만큼 사회화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는 셈이다.
청년, 성년이 돼서도 문제가 심각한 것은 마찬가지다. 수많은 유튜브와 스트리밍 방송에서는 무언가가 좋아도 욕설, 싫어도 욕설이 나온다. 좋음과 나쁨은 극호와 극불호 혹은 극혐으로 극화하고 양극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콘텐츠만 보고 지내면서 사람들은 자극에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갈수록 단순해지며 감수성이 빈곤해진다. 또한 인터넷과 방송 등에서 유행하는 ‘밈’으로 어떤 감상의 표현을 대신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극에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대신 남이 만들어낸 것으로 대체한 것과 다르지 않고 사실상 스스로 성찰하고 판단하기를 포기한 셈이다.
쉽게 울거나 화내는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게 아니라 빈곤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 변화를 성찰하는 약간의 시간도 갖지 않고 곧장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감정 표현은 반사적인 반응이다.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는 벼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수성이 빈곤한 자들 각자의 울부짖음이 공명하면서 한국 사회 담론의 주파수에 엄청난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감상과 다른 감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괴롭힌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것이 자기 비위에 어긋나는 약간의 결점이 있으면 자기 눈에 보여선 안 될 것으로, 더 나아가 존재해선 안 될 것으로 기각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내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지향점도 없다. 단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없애달라는 요구뿐이다. 감수성 교육을 괄시하고 방기해온 부작용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내훈 칼럼니스트·<급진의 20대> 저자*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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