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재밌는 것을 봤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신앙심 깊은 한 친구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증거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물이 정확히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 달이 지구를 한 달에 한 바퀴 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정확히 1년 걸린다. 해당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어이없어 반박하려다가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당장 듣기에도 굉장히 어리석은 주장이다. 어느 재치 있는 누리꾼은 ‘32도에 물이 얼고 212도에 물이 끓는 악마의 땅이 있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화씨 단위를 쓰는 미국 이야기다. 과연 실제 있었던 대화일까 의심될 정도로 황당하지만 어쨌건 교회 다니는 친구가 했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좋게 해석한다면 이른바 ‘지적설계론’의 핵심 논거를 보여준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지적설계론의 핵심은 우연성의 부정이다. 말인즉 ‘왜 하필 그렇게 돼서’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의문에서 출발해 최종 배후에 어떤 개입이 있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다. 예컨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유전자 배열이 조금만 달랐어도 생명체가 제 기능을 전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차원에서 사소한 부품이 하나라도 바뀌면 완전히 달라지는 이런 구조가 우연적인 진화 과정으로 생성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논리다.
지적설계론은 앞에서 말한 독실한 교인 친구가 했다던 주장을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적설계론을 극도로 세속화하면 ‘어떻게 그리 딱 맞아떨어지느냐’라는 경탄만 남는다. 지적설계론을 논파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앞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물이 신기하게도 0도에 얼고 100도에 끓는다는 데 경탄해 마지않는 논리에서 담론이 기능하는 바의 알레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년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세는 단위라는 사실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다 알 수 있다. 섭씨 0도와 100도는 얼음이 녹는점과 물이 끓는점에 기준을 두고 그 사이를 100등분한 것이라는 사실 역시 여기에 쓰기조차 민망한 일일 따름이다. 앞의 독실한 친구가 이 상식을 배우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다만 저 상식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탓에 혼란에 빠진 것이다.
자연현상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그것을 분절하는 과학적 단위가 있다. 시간을 나누는 단위든 공간을 나누는 단위든 에너지를 나누는 단위든 오랜 세월의 과학사를 거치면서 합의된 것들이다. 사람들이 세계를 함께 인식하고 그로써 소통할 수 있으려면 세계를 분절하는 단위를 합의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은 마디가 없는 연속체로 돼 있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무엇인지 원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예컨대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시간을 차이 속의 동일성으로 묶어 1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 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디나 경계가 없이 이어진 연속체의 스펙트럼을 인위적으로 분절한 결과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군가가 빨간색이라고 하면 가시광선의 어느 파장의 범위를 가리키는지 대체로 소통이 가능하다.
앞의 독실한 교인 친구는 어릴 적부터 학습한 자연과학의 단위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체화한 나머지 원래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데 이르렀다. 그래서 먼저 있는 단위에다 온갖 자연현상을 끼워맞춰 보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완벽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그리 신비롭고 성스러웠던 것이다.
내가 사는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분절한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새롭게 공부할 때를 상기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처음 들을 때는 어디까지가 한 문장이고 어디부터가 다음 문장인지도 알 수 없이 외국어 육성이 한 뭉텅이로 나에게 다가와서 충돌한다. 하지만 학습을 거듭하다보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어디서 문장이 끝나고 다음 문장이 시작하는지 알게 되고, 그 뒤로는 한 문장에서 어디가 주어고 어디가 술어인지, 어디까지가 한 단어고 어디부터 그다음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세계를 분절하는 단위는 소통의 근간이 아닐 수 없다. 개인 간의 소통을 넘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담론이 있어야 하고, 담론이 사회의 단위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담론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둘이 함께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땅에 인간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돌이라고 일컫는 그 대상들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돌’이 아닐 것이다. …다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있는 언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인즉 ‘돌’이라는 언어가 없다면 그것을 땅바닥이나 모래, 공기 같은 것들로부터 구별하기가 불가능하기에, 돌같이 생긴 그 어떤 것은 있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돌인지 알 수 없으므로 ‘돌’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과 같이 단순한 대상조차 담론 언어의 망을 경유해서만 파악되고 설명될 수 있다.
사물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의미로 다가오지 못한다. 대상을 본다는 건 언어의 망을 통해 그것을 분절해서 사고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의 망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물학적 특질로 주어진 것에 더해 성장 과정에서 가정교육을 통해, 공교육을 통해, 대중매체와 언론의 메시지 수신을 통해 형성된다. 즉, 내 언어의 망은 사회의 지배담론에 종속된 채 형성된다. 그러나 더 많은 독서와 공부로써 비판의식을 함양하고 다양한 예술문화를 접함으로써 독특한 감수성을 기른다면 범인의 일률적 언어 망에서 약간은 이탈한 자기 고유의 그것을 육성할 수도 있다.
독서와 공부를 다양하게 많이 할수록 시야를 넓힌다는 말이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표현은 ‘해상도를 높인다’라는 말이다. 동일한 사물을 보여주는 이미지일지라도, 해상도 높은 이미지가 해상도 낮은 이미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듯이,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높은 해상도를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언어의 망’이라는 것은 더없이 적절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그물망이 듬성듬성하게 만들어지면 그물코가 너무 크기 때문에 거대한 덩어리가 아닌 작은 것은 그물에 잡히지 않고 흘러가버린다. 그에 반해 그물망이 촘촘하면 작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끌어올릴 수 있다.
그물망을 더 촘촘하게 하는 것이 강한 어휘력이다. 어휘력이 빈곤하다면,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는 만큼 그 무엇에 대한 이해도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감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좋음과 나쁨의 감정 사이에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이 있고, 좋음과 나쁨의 양극과는 아예 무관한 미묘한 감정이 있다. 이 미묘한 것을 표현하는 어휘를 많이 알수록 자신의 감정 상태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어휘력이 빈곤하다면, 감정을 단지 좋다·싫다·이상하다로만 표현한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예컨대 내가 살면서 전혀 접해보지 못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처음 봤을 때, 그 낯섦에는 미지의 것을 향한 약간의 불쾌함이 깃들 수 있다. 어휘력이 빈곤한 사람은 이것을 곧바로 나쁨이나 싫음으로 파악하고 혐오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를 파악하고 설명하는 단어의 풀이 협소하다면, 그의 세계관은 몇 개의 단어로 축소돼버린다. 그리고 그 몇 개 단어로 삼라만상이 일거에 설명될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따르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저 신앙심 깊은 친구와 비슷한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 빠져버린다.
최근 며칠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부쩍 많이 들었다. 사교육 카르텔, 시민단체 카르텔, 노조 카르텔, 정보기술(IT) 카르텔, 통신 카르텔까지, 유승민 전 의원의 말마따나 “대통령께서 카르텔이라는 말에 꽂혀서 아무 때나 막 오용 남용하시는 것 같다”. 아무 데나 다 갖다붙이니 카르텔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수록 알기 어려워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전히 카르텔의 정확한 정의와 범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한 단어에 유난히 꽂힌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의 기근 상태에서 윤 대통령은 낯선 대통령직과 정치를 수행하면서 여러 난관과 반발을 겪고 있다. 본인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분명히 내가 옳은데 왜 반대할까. 그러다 최근에 카르텔이란 말을 배웠다. 옳거니, 내가 하려는 일에 반대와 반발이 따르는 건 모두 카르텔 때문이다. 이익을 독점하려는 특정 집단이 배후에서 여론을 왜곡하기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낮은 국정 지지율과 반대 여론이 카르텔이라는 단어 하나로 완벽히 설명됐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幸災樂禍)는 <프로보커터> <급진의 20대> 등의 저작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해온 김내훈 작가가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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