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토론 플랫폼 사이트에서 ‘엠제트(MZ)세대, 정말 유별난 걸까요?’라는 설문조사를 봤다. 응답 항목은 세 개가 있었다. (1) MZ세대만의 유별남이 분명히 있다. (2) 기원전부터 시대마다 유별난 세대는 항상 있었다. (3) MZ세대는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나는 1번 문항에 체크했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은 18명이었고 2번과 3번 문항에 체크한 사람은 각각 73명과 55명이었다.
답변 항목은 세 개지만, 사실상 ‘예/아니요’를 묻는 말이며 2번과 3번 항목이 ‘아니오’에 해당한다. 조사에 응한 146명 중 128명이 ‘아니오’라고 답한 셈이다. 또 어떻게 보면 질문부터가 이미 ‘아니오’를 유도하고 있다. 이렇게 답이 정해진 질문에 나는 괜히 열 받아서 ‘예’를 고른 것일 수도 있다. 내가 MZ세대라서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MZ’라는 세대 호명에 관한 비판은 이미 많이 나왔다. 마케팅 차원의 호명에 불과하다느니, 게으른 범주화라느니, 세대 내 개성과 차이가 너무 뚜렷하고 크기 때문에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없다느니, 부정적 낙인의 기표라느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의 시선이 깃든 말이라느니 하는 반론은 어디서든 쉽게 읽을 수 있거니와 너무나 당연하게 다 맞는 이야기라 이제 와서 여기에 한마디 더 얹어봤자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지금은 ‘MZ세대론’에 대한 비판론이 워낙 많다보니 나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내가 MZ세대라서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MZ세대가 1980년생에서 2000년대생까지를 망라하는 용어며,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범위가 20년을 훌쩍 넘는 세대 호명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MZ세대라는 말이 정말로 1980년생부터 2000년생까지 모두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사실상 MZ세대는 ‘요즘 젊은이들’ ‘요즘 사람들’의 대체어와 다름없다.
내가 ‘MZ세대, 정말 유별난 걸까요?’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것은 이른바 ‘유별나다’라는 것이 세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MZ세대의 지시 대상인 ‘요즘 사람들’을 ‘요즘을 사는 사람들’로 풀어서, 지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유별나다는 것이다. 다만 MZ세대, 젊은 사람들이 윗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유난스러운 모습을 노출할 따름이다. 그 ‘유난스러운 유별남’을 하나의 명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공간의 좌표가 하나의 점으로 쪼그라들었다.’
현재에는 거의 논박됐지만 뇌의 진화 과정이 세 단계로 나뉜다고 말하는 유명한 뇌과학 학설이 있다. 먼저 파충류의 뇌(뇌간)에서 포유류의 뇌(변연계)로, 그 뒤에 영장류의 뇌(신피질)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도마뱀을 떠올려보자. 가만히 서 있는 도마뱀을 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건드리면 그 즉시 잽싸게 달려간다. 반면 길거리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건드렸을 때 위협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영장류의 뇌로 갈수록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신체의 반응과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경로와 시간이 길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특수한 경우가 있다면 운동선수나 특수요원처럼, 돌발상황에 지체 없이 반응하고 대처하기 위해 외부 자극에서 신체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훈련으로 다시 단축하기도 한다. 어찌 됐건 신피질을 발달시킨 인간이라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한다. 길거리를 걷다가 돌연 어떤 사람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았을 때, 일단은 돌아서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때렸는지 파악부터 하고 화를 내든 뭘 하든 행동은 그 뒤에 한다.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경우처럼 상당한 정도의 불쾌감을 일으키는 외부 자극은 여러 형태로 불시에 찾아온다. 이것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가 문명화와 사회화의 척도일 수 있겠다.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상식 밖의 것,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을 접할 때 정보(자극)의 입력에서 그에 대한 반응과 행동으로까지 출력되는 경로가 얼마나 복잡한지 단순한지에 따라 포용과 관용이 될 수 있고 혐오와 폭력이 될 수 있다. MZ세대를 필두로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후자로 기울고 있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폭력적인 용례를 거치면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요즘 사람들’의 불관용을 방증한다. 1년 전 40대 남성이 제주행 비행기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면서 그 자신이 아기 울음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굴며 난동과 행패를 부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갓 돌이 지난 아기가 불편하고 낯선 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기의 보호자인 부모도 당혹스러웠을 것이 당연하며 40대 남성 역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운 울음소리라는 불쾌한 자극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그러한 고려는 없었다. 그는 곧장 참지 못하고 부모를 향해 폭언을 퍼붓고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건드린 즉시 높이 튀어 오르는 벼룩처럼,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무언가를 접한 즉시 반사적으로 그것에 대한 응징과 공격성으로 급발진했다.
현재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참교육’이라는 말은 내 기분을 언짢게 한 것에 대한 가혹한 응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사이다’가 있다. 본래 사이다는 권력의 위계에서 나보다 상층에 위치한 사람의 갑질에 기민하고 재치 있게 대처하는 상황을 두고 ‘시원하다’며 쓰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당장 내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나 폭언을 동반한 즉각적인 응징의 대명사로 변질했다. 사이다를 끼얹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어린이가 될 수도 있고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맥락 파악이나 관용과 이해, 고려와 배려는 일절 없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상대를 기어코 응징하고야 말겠다며 달려드는 사람들, 다시 말해 반성(성찰)은 없고 반사만 남은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없다. 남은 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기분뿐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가 당시 청년들을 두고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이 극소한 조각으로 잘려져 있고,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종합하지 못한다고 진단했던 것이 현재 한국에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으로 축소됐음을 드러내는 또 다른 것으로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탕진’ ‘묻고 더블로 가’ ‘노빠꾸’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로 이어지는 유행어의 흐름이 있다. 하나같이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앞뒤 재지 않는다’ ‘미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잃을 것이 없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로 함축된 말이다. 내가 지금 행하는 어떤 일이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나중에 어떤 후폭풍으로 돌아올지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공간의 좌표 역시 ‘나’라는 점으로 축소됐음을 드러내는 징후를 읽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고려와 배려, 위신이나 체면에 대한 일체의 고려가 단지 ‘나’에게 집중됐다는 말이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상대에 대한 공격성으로 급발진하는 것은 주변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위선이 지고의 악으로 설정돼버린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서 점잖은 척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은 위선으로 기각된다.
더욱이 한국 사회의 ‘롤모델’ 형상이 붕괴하면서 기성세대와 꼰대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전통과 문화로부터 단절을 시도하는 등 ‘탈꼰대’를 위한 전방위적 반성이 진행됐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스처의 차원에 머물렀지만, 젊은이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단절과 전환이 속도조절 없이 이뤄지면서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가치와 규범을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연히 주어진 권리인 양 경거망동하는 ‘맑은 눈의 광인’(맑눈광)이 양산됨에 따라, 일체의 사회생활에 그 어떤 상황이나 행동 등에 대한 평가와 판단의 근거가 최종심급으로서 법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틀린 얘기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욕먹어야 하냐’며 구시렁대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공동체의 사회적 의례와 관습은 사라지고 당장의 기분만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갈수록 참을성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모든 시선이 지금 당장의 나에게로 쏠려 있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연대란 언감생심이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며 비아냥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들의 강력한 응징의 정서가 누적되고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연대 없는 공감’은 거대한 사회적 퇴행을 선도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어떤 장애물에 의해 가로막히면, 그에 대해 단지 악쓰며 분노를 표하기만 하면 보호자가 나타나서 장애물을 치워줄 거라 기대하는 유아기로의 퇴행 말이다. 그 보호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퇴행 자체가 곧 정치가 될 것이다.
김내훈 칼럼니스트·<급진의 20대> 저자*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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