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만난 친구와 대학이나 직장에서 만난 친구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전자는 사회화가 덜 됐을 때 만난 친구고 후자는 사회생활을 위한 가면을 쓴 채로 만난 친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치장과 가식 없는 날것의 모습’을 드러낸 채로 만나느냐 드러내지 않은 채로 만나느냐의 차이다. 이런 점에서 성인이 된 뒤 알게 된 친구보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를 대할 때 훨씬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같이 목욕탕이라도 가서 발가벗은 모습을 서로 보여야만 비로소 절친한 사이가 됐음을 느낀다. 다른 한편 성인이 된 뒤 만난 친구와의 교제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일정한 예의를 갖추고 사회적 의례를 따르는 등 사회적 가면을 쓴 채로 만나고 소통함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성인이 된 뒤 알게 된 지인만 남겨두고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과는 아예 연락을 단절하기도 한다.
캐나다 출신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사회생활을 연극에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상호작용하는 타인들 앞에서 자아를 연출하고 연기한다. 자신이 남들에게 좋은 이웃으로, 훌륭한 인간으로 비치기 위해 하는 ‘인상관리’로써, 본인 인성의 못난 부분은 관리된 인상 뒤에 숨기고 좋은 부분만 보여주려 애쓰는 것이 연극 연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고프먼은 관리된 인상과 그 뒤에 숨은, ‘관리 안 된’ 부분을 무대의 전면과 후면에 비유했다. 흔히 ‘무대 뒤’라고도 부르는 후면은 배우가 연기를 준비하거나 다 끝내고 휴식하는, 아직 화장이 덜 되거나 다 지운 상태의 모습을 숨기는 장소다. 연극 연기를 준비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어떤 배역이 아니라 본래의 나로서 있는 공간이다. 연기자들은 어떻게든 후면을 최대한 가림으로써 자신이 맡은 배역의 핍진성을 높이려 한다. 반면 관중은 무대 뒤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늘 궁금해한다. 무대 후면은 최대한 가리려 애써도 완전히 가려지지 못하며 언제든지 갑자기 노출되고 간파될 여지를 남겨둔다. 관중은 어떻게든 그 틈새를 파고들어 연기자의 관리된 인상 이면을 직접 보려 한다.
꽤 많은 사람은 상대방의 페르소나, 가면 벗은 민낯을 봐야만 비로소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우정이 지속되기 어렵다. 사회적 가면을 쓰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 앞에서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가면을 쓰게 된다. 내가 스스로 남에게 주고 싶은 인상, 친구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인상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 그것을 내 배역으로 삼아 연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실망감을 안기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친구 관계가 이럴진대 애인이나 부부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에서 단 한 톨의 거짓을 용납해선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꽤 많다. 상대방의 ‘무대 뒤’를 낱낱이 들쑤실 수 있는 완전한 접근 권한을 서로 부여해야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무대 뒤 모습, 가면 벗은 모습을 보여주기 극히 꺼리며 상대방에게도 그의 인상관리가 안 된 후면을 자신에게 가능한 한 보여주지 않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연애할 때는 물론이고 결혼생활을 할 때조차 반려자에게 어떻게든 화장하지 않은 민낯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트림이나 방귀 등 생리현상을 트지 않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다. 그것이 아내로서 혹은 남편으로서 응당 지켜야 할 예의라고 여기는 듯하다. 가장 편해야 할 공간에서마저 인상관리, 연극 연기를 멈추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는 ‘내로남불’형이 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본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연기를 일절 하지 않을 것이지만 상대는 이상적인 배우자로서의 본분과 행색을 365일 24시간 지키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저 극단적인 세 유형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으레 서로 간에 거짓과 기만, 위장, 숨김은 가능한 한 없기를 바라지만, 그렇다고 단 한 톨의 거짓도 허용치 않고 완전한 진실만 희구한다면 곤란한 일이 일어난다. 사회를 이루는 인간관계는 반드시 일정 정도는 허구와 거짓에 기초를 둬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할당되고 자처하는 어떤 배역이 그 사람 자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배역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는 동시에 허위와 속임수, 가장이 있더라도 인상관리를 하려는 노력, ‘척하기’를 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한 남편인 척 혹은 아내인 척’하는 것이 안정적이고 행복한 결혼생활의 토대가 된다는 말이다.
‘척하기’, 아닌 것을 그러한 것처럼 가장하고 꾸미고 때때로 허위를 동원해 연기하기는 상당한 정도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노력’이라는 것에 전반적인 회의감이 확산함에 따라 인간관계에서 노력에 대한 회의 역시 늘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대중 안에서 확산한 ‘노력에 대한 회의’는 과거 양상과는 약간 다르다. 이를테면 ‘노오력’이라는 말로 냉소를 표현하던 7~8년 전에는 개인의 노력 여하와 전혀 무관하게 불행해지는 사회구조에 대한 회의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차이가 있다면 개인의 노력 여하가 시험점수 등의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신화가 다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 기준에 미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은 그 성취에 대한 권한이 절대적으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성취가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위시한 인간관계와 사람 자체를 어떤 성취의 대상으로 물화(대상화)하는 사람 가운데 젊은 남성들은 마땅히 여자를 부여받을 만한 상당의 노력을 했다고 스스로 믿으면서, 여자를 이른바 ‘알파메일’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열패감은 ‘퐁퐁남’이라는 유행어로 표상된다. 퐁퐁남은 이른바 ‘설거지론’에서 파생된 말인데, 여자가 한참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다 혼기가 차면 남자의 경제적 조건과 능력만 보고 사랑은 없이 결혼함으로써 안정성을 희구한다는 서사가 담겨 있다. 퐁퐁남은 그런 여자와 결혼한 남자를 주방세제에 빗대어 붙인 멸칭이다. 남자들은 자신이 퐁퐁남 신세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결혼한 모든 여자를 의심하며 급기야는 자신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여자에게도 의구심을 갖게 된다. 내가 전문직이라서 그러나? 내 부모님이 잘살아서 그러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조용하고 착하기만 한 성격이어서 결혼하면 경제권을 다 가져가고 전업주부를 하겠다면서 밖에서 놀기만 하고 이따금 다른 남자도 만나며 꿀 빠는 삶을 살려는 건 아닐까?
젊은 남성 사이에서 이제는 사실상 퐁퐁남이 유부남의 대체어가 됐다. 다만 이것은 비혼주의의 천명이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나 능력, 직업, 인성, 사교성 등 사회생활의 지표를 전부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 자체로 사랑해주는 참한 여자가 어딘가에 있으며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고 힘을 들여 가장하고 연기하며 인상관리를 하는 이유는 상호작용하는 상대방을 동등한 존재이자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나쁘거나 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음으로써 나 역시 상대에게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과 관련한 모든 것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결국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하는 행위들 자체가 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정의 메커니즘이 정초되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없고 이해관계만 남는다.
이른바 ‘반반 결혼’ ‘엑셀 결혼’이라는 말이 크게 화제다. 이 말이 가리키는 현상은 이미 수년째 지속되고 있다. 결혼 준비 비용과 혼수 비용을 천원 단위까지 엑셀 프로그램에 기록해가며 철저히 절반씩 부담하고, 결혼 뒤에도 생활비 세목을 낱낱이 따져가며 ‘반반’의 균형을 완벽히 맞추지 않고서는 부부관계가 지속되지 못하는 추세를 말한다. 가사노동도 분 단위까지 맞춰가며 누구 하나 더 하거나 덜 하는 사람이 없어야만 손해 보는 느낌 없이 비로소 형평성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백원 수준에서 혹은 몇 분의 수준에서라도 불균형이 생기면 내가 퐁퐁남이 된 것 같은 억울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기어이 이혼까지 하는 것을 가리켜 ‘엑셀 이혼’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어떤 존중이나 헌신을 찾을 수 없다. 필요에 의한 역할 분담과 손익을 따지는 이해관계뿐이다.
헤겔은 사랑을 가리켜 ‘서로가 타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 글의 맥락에서 풀이하자면, 한 사람이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사랑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가장하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런 점에서 그 누구의 시선과 평판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본모습’ 그대로, 가면과 옷을 전부 내던져버린 채 살려는 사람은 사랑할 이유가 없다. 전통적인 성역할과 돌봄노동 및 재생산의 의무와 가치관이 완전히 붕괴함에 따라 부부관계를 지탱할 외적 강제성이 더는 없다면, 부부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사랑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끼리 부부가 된다면 그 관계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이해관계뿐이다. 이해관계로 묶인 사람은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 물화할 따름이다.
다시 헤겔을 참고하자면 그는 사회 공동체를 세 단계로 설명했다. 사랑으로 뭉친 가족, 권리 인정의 관계로 얽힌 시민사회, 그리고 둘이 종합된 연대와 공공성에 기초한 국가다. 요컨대 사랑 없는 국가는 불가능하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교단에 서는 게 부끄럽다”…‘나는 왜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나’
홍철호 사과에도 “무례한 기자” 파문 확산…“왕으로 모시란 발언”
음주운전·징계도 끄떡없던 강기훈 행정관, 결국 사의 표명
[영상] 박정훈 대령 “윤 격노는 사실…국방부 장관 전화 한 통에 엉망진창”
관저 ‘유령 건물’의 정체 [한겨레 그림판]
[속보] “우크라군, 러시아 ICBM 발사”
두바이서 로맨스 한 죄 무려 ‘징역 20년’…영 10대, 정부에 SOS
[속보] 우크라 공군 “러시아, 오늘 새벽 ICBM 발사”
[단독] 대통령 관저 ‘유령 건물’…커져 가는 무상·대납 의혹
이제 윤석열과 검찰이 다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