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와 언쟁할 때, 형식적 토론이든 감정 섞인 말싸움이든 내가 완벽한 승리를 거뒀음을 알리는 신호는 따로 있다. 상대가 횡설수설하며 다른 주제로 바꾸려 할 때? 갑자기 욕할 때? 이보다 더 확실한 신호가 있는데 바로 상대방이 무슨 말을 더하건 자신도 모르게 내 논거를 강화하는 모양새가 될 때다. 이 경우 비로소 내가 이겼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상대방은 나름대로 자신의 논거를 더하려 말을 더 얹지만 그때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깐?”이라고 받아치면 상대방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꼼짝없이 패를 인정하거나 자리를 엎고 떠날 수밖에 없다.
쉽게 경험하거나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언쟁의 핵심이 되는 특정 어휘의 정의를 내가 의도한 대로 정해두고 언쟁을 진행하면 계속해서 유리한 논점을 선점할 수 있다. 여기에 고도의 논박 기술을 더한다면 상대방이 알아서 내 주장을 대신 해주게 할 수 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다. 언쟁 상대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려 이러저러한 말을 덧붙이지만 핵심 단어가 한쪽에 유리하게 정의된 이상 언쟁이 길어질수록 한쪽 주장만 반복되는 형편이 된다. 이런 형편이 되면 언쟁을 중단하거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제의 어휘 정의부터 다시 합의해야 한다.
앞의 상황을 좀더 거창하게 표현해보면 ‘헤게모니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폭력을 동원한 협박이나 강제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게 했을 때 헤게모니적으로 승리했다고 말한다. 상대는 스스로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고, 혹은 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머리를 굴리며 행동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이때 상대를 완벽히 굴복시켰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언젠가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직에서 퇴임하고 한참 뒤에 자신이 남긴 가장 훌륭한 유산이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라고 대답하면서 ‘우리의 적이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납세자’와 ‘소비자’를 위한 정치를 표방하며 ‘중도 합의’로 가는 ‘제3의 길’ 모델을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유일한 모델로 내세웠다. 합의를 제외한 일체의 투쟁과 적대는 스스로 ‘구태정치’로 기각했다. 블레어와 신노동당은 대처의 정치에 대항하던 최대 세력으로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바로잡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당으로서는 실각 이후로도 계속 자신들의 의제를 관철할 수 있었다. 상대 정당이 그 일을 대신 해주게 만듦으로써 말이다.
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어느 세력이 쥐고 있느냐는 어느 진영 혹은 정당이 더 높은 지지율과 더 많은 의석을 보유하느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다. 현재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세력은 의석수가 더불어민주당에 많이 밀리는 형편이고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이지만, 헤게모니적으로는 보수세력이 완벽히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됐던 몇몇 핵심 단어의 정의가 보수세력이 정한 채로 논쟁이 이어지고 담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 핵심 단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청년’과 ‘공정’이 있다. 두 단어는 어마어마한 중력을 갖고 있기에, 어떤 논의에서건 청년과 공정이 거론되면 두 단어를 둘러싼 언쟁으로 흘러가버린다. 흡사 블랙홀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출발점부터 보수세력에 매우 유리하게, 그러니까 주제가 되는 단어의 정의부터가 보수세력이 정한 상태에서 논쟁이 진행되기 때문에 논쟁이 길어질수록 결국 보수주의의 의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당대의 중요한 어휘를 둘러싼 헤게모니 전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름 아닌 ‘정치’라는 단어가 철저히 보수세력에 유리하게 정의됐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 유구한 역사의 정치혐오와 맞닿아 있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일상에서 ‘정치’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보자. ‘정치질’이란 말을 흔히 쓴다. 어떤 조직에 속한 사람이, 자신의 극히 사적인 영달을 위해 권력자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아첨을 떤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음해 공작으로써 조직에서 퇴출되게끔 유도하는 따위의 행태를 두고 으레 ‘정치질한다’고 표현한다. 이렇듯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에게 ‘정치’라는 말이 연결될 때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한 사람의 인성이나 경향을 묘사할 때 ‘정치적’이란 말이 붙으면 그의 인성이 아주 훌륭하리라는 기대는 일단 접고 본다.
정치혐오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직업정치인 사이에서도 정치라는 말이 부정적 맥락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 정치를 부정적 의미로 쓰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과거 이명박이 어느 논란이 되는 사안이건 항상 입버릇처럼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이래, 보수 진영은 꾸준히 정치에 부정적 인상을 덧씌우며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자양분 삼아 쪼그라들다가도 다시 세력을 불리기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진보 진영마저 정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진보 진영에서 ‘정치’에 관해 어떤 말을 하든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진보 진영은 자기 손으로 보수 진영의 코를 대신 풀어주고 있다.
진보 진영은 정치혐오 확산을 경계하면서도, ‘정쟁’과 ‘정쟁화’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씀으로써 의도치 않게 정치혐오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정치’와 ‘정쟁’을 구별해서 후자만을 규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2022년 태풍 ‘힌남노’ 피해와 이태원 참사부터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잼버리 파행까지, 예방될 수 있었던 인재와 파행에 대해 책임소재를 규명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보수 진영과 언론이 집요하게 정쟁 프레임을 씌운 끝에 사실상 ‘정치’와 ‘정쟁’은 이음동의어가 됐다. 현재 정쟁이란 말은, 묻히면 ‘순수성’을 떨어뜨리는 오염물질 비슷한 것으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정쟁’과 구별되는 올바른 ‘정치’는 무엇일까? 토니 블레어가 대처리즘에 굴복하며 내걸었던 ‘중도 합의’뿐일 테다.
일반적으로 정쟁 혹은 정쟁화는 ‘정치 전쟁’ ‘정당 전쟁’으로 이해되고, 정쟁을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해를 유도한다. 정쟁이란 말의 정의를 ‘정치적 쟁점화’로 바꿔야 한다. 정치적 쟁점화는 특히 오늘날과 같이 분노, 슬픔, 열패감, 원한이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터져나오는 시기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 비슷한 참극이 연이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 어떤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면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따져보고 조사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와 작업을 일반인 개인들이 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에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이 개입한다. 이렇게 피해자 대신 목소리를 내어 쟁점을 제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당국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쟁점화’다.
정치적 쟁점화는 당연히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정치적 쟁점화는 ‘정쟁’이라는 말로 축소되고 부정된다. 정치인더러 정쟁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이런 이야기가 일부 진보 진영에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 본인들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사안에 관해 ‘정쟁’이란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사안에 결부된 일체의 진상규명, 문책의 시도가 정쟁이란 말에 빨려 들어가고 소거돼버린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할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이다. 이 규칙은 그 누구도 피하기 어렵다. 담론이 그렇게 구성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쟁점화는 경계를 설정한다. ‘우리’와 ‘우리의 적’을 가르는 경계 말이다.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시스템을 허술하게 만든 사람들, 멀쩡한 시스템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은 사람들 등이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우리 적의 무능함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을 공유하고 그들을 문책하고 단죄하고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요구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결집한 결사체다. 자연히 정치적 쟁점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당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쟁’의 인상을 순수함을 해치는 불순물로 간주하고 당파성을 배제한 ‘탈정치’를 표방하면 도처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슬픔·애도·원한은 결집하고 주체화하지 못한 채 산만하고 얄팍하고 분산된 상태로 부유하기만 한다. 분노 등의 감정이 누적되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은 하되 정치적으로 집결하지 않으면 당장 눈앞의 이웃에게 모든 감정이 향하게 된다. 지금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존재, ‘갑질’ 손님과 학부모, 공중도덕을 학습하지 못한 어린이와 어린이를 훈육하지 않은 ‘맘충’ 등 일반인 개개인들에 대한 가학적인 응징과 단죄로써 카타르시스에 흠뻑 젖고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주변화되고 목소리 없는 존재의 고통 증언을 정치화하려 했다. 일부 진보 진영에서 ‘정쟁’을 규탄하는 것은, 이 명제에 맞춰 ‘정치’라는 것을 대의제 및 제도권 의회 정치를 넘어선 새롭고 더 넓은 개념의 무언가로 상상하려는 시도라고 선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공적 담론이 사적인 기분과 개인들의 민원으로 용해돼버린 포스트정치, 탈정치 시대에 정쟁을 규탄하고 양비론으로 양당을 비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공허한 우월감뿐이다.
김내훈 칼럼니스트·<급진의 20대> 저자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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