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열릴 때면 언제나 깜짝 스타가 한두 명씩 탄생한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많은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거나 메달과 관계없이 강력한 카리스마 혹은 빼어난 외모, 독특한 성격과 행동거지, 인터뷰에서의 재밌는 돌출 발언 등 이유는 다양하다. 그동안의 올림픽 스타들을 대략 기억나는 대로 열거해보자면 2008년의 이용대, 2010년의 이상화, 2012년의 양학선, 2018년의 윤성빈과 여자 컬링팀, 2021년(2020)의 안산 선수 등이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2024 파리올림픽이 절반 이상 진행되고 있는데 이번에도 깜짝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격의 김예지 선수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올림픽을 시청하는 국적 불문 모든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일약 세계적 유명인이 됐다. 10m 권총 사격 경기에 임하는 내내 무표정과 차분함으로 냉철한 ‘프로페셔널’을 보여주다가도 인터뷰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는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편 같은 사격 종목에서 튀르키예의 유수프 디케츠 선수가 온갖 복잡해 보이는 특수 장비를 갖춘 다른 경쟁 선수들과 달리 이어플러그만 낀 채 경기에 임해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전세계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네티즌들은 우스개로 그가 실제 ‘히트맨’이 아니냐면서 그의 ‘백스토리’를 자기들끼리 상상하며 유희하고 있다.
다만 김예지 선수가 스타가 된 결정적 계기는 은메달을 획득한 올림픽 경기 자체에 있지 않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총을 격발했던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이 매료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던 가운데, 한 네티즌이 2024년 5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사격 월드컵에서 김예지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깨며 금메달을 확보하는 장면을 엑스(옛 트위터)에 올렸다. 사격 선수로서 최고의 성과를 내며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에도 관심 없다는 듯 혹은 당연하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장비를 정리하는 모습을 본 한 이용자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만화 주인공 분위기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는 캡션을 달았다. 이에 수많은 국외 네티즌이 김예지 선수의 모습을 여러 대중문화 포스터 등에 합성하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런데 올림픽 시즌에 올림픽이 아닌 바쿠 사격 월드컵 영상이 세계적 화제가 된 탓에 약간의 혼란이 발생했다. 올림픽 소식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하는 사람은 물론, 올림픽 경기를 보더라도 모든 경기를 챙겨보지 않는 많은 사람이 김예지 선수가 이번 올림픽 대회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리스트가 됐다고 착각한 것이다. 게다가 해당 영상을 재게시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올림픽에서 신기록을 세웠다’는 캡션을 붙인 탓에 오해가 가중됐다. 또한 어디서 발원했는지도 모를, 그가 허리에 매달고 있던 코끼리 인형을 두고 딸이 준 것이라는 이야기가 일파만파 퍼져 나중에 코치에게 받은 수건이라고 해명해야 했다.
한국의 김예지 선수나 튀르키예의 디케츠 선수와는 다르게 좋지 않은 이유로 별안간 전세계에 이름을 알린 올림픽 출전 선수가 있다. 66㎏ 여자 복싱에 출전한 알제리 출신의 이마네 칼리프다. 2024년 8월1일 열린 16강전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안젤라 카리니가 칼리프와 겨뤘는데 카리니는 칼리프에게 두 차례 펀치를 맞고 경기 시작 46초 만에 기권했다. 그는 ‘여태껏 경험해본 펀치와는 달랐다’며 자신의 건강이 우려돼서 기권했다고 밝혔다. 칼리프의 승리가 선언된 뒤 카리니는 칼리프와의 악수를 거부하고(나중에 사과했다) 울면서 경기장에서 나가 논란이 일었다. 카리니와 칼리프의 경기가 같은 여성끼리의 경기가 아니었다는 것이 논란의 요지다.
미국의 극악한 사이버레커 계정으로 악명을 떨치는 ‘립스 오브 틱톡’(Libs of TikTok, 극우 논객 하야 라이칙이 운영하는 계정으로 여러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수백만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다)은 곧장 해당 사건을 재게시하면서 ‘남성이 여성을 팼다’고 규정했다. 대규모 혐오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해당 계정은 줄기차게 칼리프를 남성이라 칭하며 카리니를 ‘LGBT 프로파간다’ ‘리버럴 어젠다 음모’의 억울한 희생자로 위치시키고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리버럴의 음모에 포획된 부패 집단이라는 인상을 유도했다. 그리고 해당 계정을 포함해 그의 팔로워들 및 비슷한 성향의 엑스 이용자들은 이 문제를 어김없이 민주당에 대한 비난으로 연결하면서 민주당 의원들과 카멀라 해리스 대통령 후보가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칼리프를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카리니 선수의 ‘억울함’에 대한 안타까움과 공감의 정서를 진보적 의제 전반에 대한 반감과 민주당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미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기사가 나왔지만 여기에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칼리프는 남성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그는 알제리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여권에도 여성으로 등록돼 있고 평생 여성으로 자랐으며 복싱은 여성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 선수가 됐다. 도쿄올림픽에도 출전한 바 있고 그때는 이런 논란이 없었다. 많은 사람이 칼리프를 남성이라거나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면서 근거로 드는 건 2023년 국제복싱협회(IBA)의 성별 적격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실격 처분을 받은 전례다. 그런데 이마저도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았다는 것이 IBA의 설명이지만 이를 산출하기 위해 어떤 테스트를 실시하고 어떤 프로토콜을 따랐으며 어떤 데이터가 나왔는지 투명하게 제시된 것이 없다고 전해진다.
칼리프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면 인터섹스(간성인, 남녀 이분법에 해당하지 않는 성징을 지닌 사람)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면서 인터섹스의 올림픽 출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칼리프의 성별이 여성 외의 다른 것이라는 시비가 붙어야 할 근거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엑스를 비롯한 소셜미디어 등지에서는 칼리프를 향한 조롱과 괴롭힘이 심각한 수준으로 이어지고 있다. 트랜스젠더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칼리프가 남성이라고 주장하며 ‘당신들이 말하는 용기란 남성이 여성을 팰 용기냐’라는 비아냥으로 논의를 오염시키고 있다. 이에 사실관계를 정정하며 반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칼리프의 바지 주름이 돌출된 것처럼 촬영된 사진을 들이대며 ‘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봐라’라고 말해 논쟁을 차단해버린다. 일부는 여성주의 진영의 메시지를 전유하며 ‘여성 선수/스포츠가 위협당한다’라는 식으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칼리프를 부당하게 괴롭힘과 동시에 일체의 성소수자 담론을 생물학 본질론으로 축소하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진 데에는 일부 언론 탓이 없지 않다. 비록 앞서 내가 ‘논란’이라고 했지만, 이것을 언론이 ‘논란’이라고 보도하기까지는 더 정밀한 취재가 선행돼야 했다. 상당수 언론은 IBA의 성별 자격 실격 조처와 관련해 추가적인 팩트체크 없이 그 조처가 있었다는 사실만 되풀이하고, 과거 도쿄올림픽에서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선수가 출전해 논란을 빚은 사실을 병렬하면서 칼리프가 트랜스젠더라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보도했다. 기사 제목에는 ‘여성? 남성?’ ‘성별 논란’ 따위로 쓰면서 사실관계 전달보다는 선정적 문구로 클릭수만 높이려는 행태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와 ‘해리 포터’ 시리즈 작가 제이케이(J.K.) 롤링 같은 저명인사들도 혐오에 가세했다. 일부 언론이 제 기능을 멈춘 와중에 극우 진영과 혐오자 그리고 이른바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혐오 정서를 있는 힘껏 분출하면서도 정의의 편을 자처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찾아 기고만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칼리프에 대한 철 지난 가짜뉴스가 여전히 돌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반응하고 있다. 다수의 관련 게시물은 복싱 선수의 성별 시비를 소개하면서 파리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반감과 연결하기도 했다. ‘남성 선수가 여성 경기에 출전해 여성 선수를 구타했다’는 허위의 구도가 유도하는 반사적인 거북함의 감정을 개막식이 표방한 포용성, 다양성과 연대의 메시지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하는 뻔한 수작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이 뻔한 수에 넘어간다.
김예지 선수가 딸에게 받은 코끼리 인형을 허리에 차고 경기에 임한다는 가짜 정보는 귀여운 해프닝이지만 여성 복싱 선수의 성별 시비 사건은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상당수 언론사에 반성을 촉구할 일이지만, 가짜 정보와 비방 게시물에 담긴 어떤 이미지나 구도가 유발하는 반사적 감정에 휘둘려서 모든 판단력을 상실한 채 혐오를 발산한 사람들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다. ‘차별은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 이슈를 ‘공정 논란’으로 끌고 가는 점잖은 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전형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한 면모나 특성을 지닌 사람을 가리켜 ‘여성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과연 정말로 여성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 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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