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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정당 없는 당신, 중도층인가요?

‘스윙보터’를 오인한 양당 정치…진보 정당 보수화는 ‘중도 확장’ 기능 못해
등록 2024-06-07 20:22 수정 2024-06-13 08:17
지난 총선을 한 달 앞둔 2024년 3월11일, 중도층 확대를 강조한 방송 리포트. 연합뉴스 티브이 갈무리

지난 총선을 한 달 앞둔 2024년 3월11일, 중도층 확대를 강조한 방송 리포트. 연합뉴스 티브이 갈무리


한국의 정치 담론에서 ‘중도층’이라는 말은 다른 여러 단어와 돌아가면서 쓰이는 것 같다. 무당층, 부동층, 정치 무관심층, 스윙보터 혹은 캐스팅보터 등이 그것이며 종종 청년층이라는 단어와도 연결될 때가 많다. 이 단어들이 의미하고 지시하는 바가 전부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중도층은 양극 사이에서 중간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무당층은 뚜렷하게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에 무관심해서 그럴 수도 있고 오히려 정치를 아주 잘 알아서 그럴 수도 있다. 부동층은 국면마다 투표하는 정당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저 단어들은 마치 언제라도 서로 대체가 가능한 단어인 것처럼 뚜렷한 구별 없이 언론 보도에 많이 쓰이고, 정치인들에게도 구별 없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치 담론에서 중도층, 무당층, 부동층은 혼용해서 쓰인다. <경향신문> 2024년 4월10일 보도.

한국 정치 담론에서 중도층, 무당층, 부동층은 혼용해서 쓰인다. <경향신문> 2024년 4월10일 보도.


중도·부동층 반대쪽엔 ‘강성당원’?

몇 가지 예를 들자면, 2024년 4월10일 제22대 총선 당일 발행된 <경향신문>의 ‘정치에 등 돌린 2030세대, 이들의 표심이 승부 가른다’는 기사에서는 “부동층 비율이 높은 2030세대” “중도층·무당층 비중이 많은 2030세대”라는 말이 거듭 거론된다. 앞에서는 부동층 비율을 이야기하다가 그 뒤에는 중도층과 무당층 비중을 이야기하는데 이렇다 할 해명 없이 2030세대를 꾸미는 말로 부동층에서 중도층과 무당층으로 단어를 바꾸지만 어색함이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중앙일보>의 5월21일치 기사 ‘1만 명 탈당에 지지율 6%↓…‘추미애’가 이재명에 던진 숙제’에서는 중도층이라는 말이 다수 거론된다. 더불어민주당의 이른바 강성당원인 ‘개딸’과 중도층을 대립적인 위치에 놓으며 둘의 관계를 영합게임의 관계로 설정한다. 강성당원의 지지를 얻으면 중도층의 지지를 잃고 중도층의 지지를 얻으면 강성당원의 지지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강성여론, 즉 개딸에게 휘둘리다가는 스윙보터의 표심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한 전문가의 논평을 인용한다. 해당 기사에서는 “스윙보터(Swing Voter, 중도·부동층)”라고 표현돼 있다. 중도층과 똑같이 부동층을 강성당원과 ‘영합게임의 관계’에 놓은 것이다.

제22대 총선 닷새를 앞둔 날에 발행된 <서울신문>의 사설 ‘늘어난 박빙 승부처, 중도 표심 역할 더 커졌다’에서도 중도층과 무당층이 세트로 언급된다. 자연스럽게 “중도·무당층”이라고 표현되며 이들은 곧 ‘캐스팅보터’와 동일시돼 있다. 사설은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캐스팅보터로서 ‘중도·무당층’의 역할을 강조하며 “양극단 정치” 지형에서 그들의 표가 더 많이 반영될수록 민주주의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명제에서 사설이 인위적으로 전제한 것은 현재 한국 정치가 거대 양당으로 양극화해 있으며, 거대 양당 중 어느 한쪽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은 극단으로 분열된 여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유권자들이고 따라서 정당과 정치인들이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정치 양극화와 혼란이 덜해지리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무당층이 아니라 고정적으로 양대 정당 중 한 곳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별안간 강성 지지층 혹은 강성당원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단지 특정 정당을 비교적 확고히 지지한다는 사실만으로 말이다. 이들 중 실제 당원이 얼마나 되는지, 이들이 실제로 당비를 납부하고 경선에 참여하는지는 관심 사항이 아니다. 심지어 ‘개딸’만 최소 500만 명, 최대 1천만 명이 있다고 말하는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 같은 사람도 있다.

한국 정치 담론에서 중도층, 무당층, 부동층은 혼용해서 쓰인다. <국민일보> 2023년 9월12일치 칼럼.

한국 정치 담론에서 중도층, 무당층, 부동층은 혼용해서 쓰인다. <국민일보> 2023년 9월12일치 칼럼.


양당 정치에 협소해진 정치적 상상력

한 가지만 더 예로 들자면 <국민일보> 2023년 9월12일치 ‘신종수 칼럼’의 ‘중도층 파이팅!’이 꽤 노골적이어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본문 첫 문장부터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중도층이 역대 최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30% 넘게 나온다”라고 쓰여 있다.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당층이다. 무당층이 어째서 중도층이라 불릴 수 있는지 해명은 전혀 없이 곧장 중도층으로 도약해버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30%”라는 것도 당시 2023년 9월의 여론조사를 찾아보건대 중도층이 아니라 무당층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런 합리화 없이 엄연히 의미가 다른 무당층을 중도층으로 바꿔버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독해를 유도한다. 한국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는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표상한다. 양당을 모두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진보와 보수의 정치 양극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다. 칼럼 필자의 말마따나 “정치 팬덤과는 거리가 먼 침묵하는 다수”이며, 극성스러운 팬덤과는 다르게 침착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이 글은 이렇게 진보와 보수를 양대 정당에 한정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 상상력을 협소하게 만들고, 각자 나름의 이유로 지지하는 정당을 여론조사업체에 밝힌 사람은 극성스러운 팬덤으로 폄하한다. 양대 정당이 양방향으로 극단적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무당층이 아닌 사람은 이미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돼버린다.

자연히 각 정당에 요구되는 것은 중도층에 대한 소구력을 높이는 것이다. 소위 합리적인 성향의 중도층이 아니라 극성맞은 강성당원 및 팬덤만 챙기다가는 한국 정치가 더 양극으로 심각하게 분열되리라는 우려가 늘 제기된다. 하지만 중도층이 정말로 중도층인가? 진보와 보수의 관념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지지 여부로만 고정된 한국의 정치 지형과 담론에서 중도가 어디에 있는지 가리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뚜렷한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층이나 부동층 혹은 정치 무관심층을 중도층과 같은 집단으로 제시하는 방향을 택한다.

언론과 정치인들에게서 거론되는 ‘중도층 공략’은 ‘부동층 공략’이나 ‘무당층 공략’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즉 실체가 보이지 않는 중도층을 공략하려면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유권자층을 공략해야 한다. 그나마 지표상 윤곽이 잡히는 집단이 무당층이지만 무당층의 구성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점뿐이다. 이러한 정치 담론 아래서 결국 ‘중도층/부동층/무당층 공략’은 정치혐오층 공략으로 수렴한다.

중도층 신화가 덧씌워진 부동층

앞서서 중도층과 무당층, 부동층이 종종 청년층이나 2030세대와 연결됨을 지적했다. 그렇게 구성된 정치 담론은 양극화한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청년들이 마음을 둘 곳이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착시에 불과하다. 양극으로 분열된 정치라는 것부터가 중도층, 무당층, 부동층이라는 말로 인해 구성된 인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인상은 청년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가려버린다. 따라서 청년들로서는 자연히 양비론에 매몰될 수밖에 없고 이것은 다시 청년들이 중도층이자 무당층이라는 신화를 되먹임한다. 최종적으로 청년 세대 유권자의 정치혐오를 완화할 논의의 여지가 닫혀버리고, 세대를 막론한 일반 유권자의 정치혐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중도 확장’이라는 당위는 국민의힘보다는 더불어민주당에 더 유해할 수 있다. 도리어 국민의힘에 중도 확장은 극우화의 막다른 길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일 수 있겠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에는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진보나 보수나 거기서 거기’라는 그릇된 인식을 떨쳐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앞서 말한 양극화의 인상, 즉 이 경우 극좌라는 허위의 인상과 함께 이중의 과제가 주어져 있다는 말이다. ‘양극화’와 ‘거기서 거기’라는 인상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지만 정치적 상상력이 극도로 협소한 상황에서는 양립할 수 있다. 담론으로 구성된, ‘서로 크게 다르지도 않으면서 민생과 무관한 지엽적인 문제로 편을 나눠 유치하게 싸우기만 하는 엘리트 기득권층에 대한 원한 감정’이 그것을 지탱한다. 이런 형편에서 중도 확장을 명목으로 진보 의제의 속도를 늦추고 종합부동산세 폐지나 완화 등 보수 진영의 의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신화에 불과한 중도층의 표심을 끌어올 수 없다.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난다. 진보나 보수나 다를 것이 없다는 그릇된 인상과 양비론만 강화한다. 진보정당의 우경화에 환멸이 난 유권자들이 극우 포퓰리즘 세력에 매료되는 서구의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 중도층과 부동층은 서로 다른 집단이며, 한국 정치 담론에서 이야기되는 중도층은 중도층이라는 신화가 덧씌워진 부동층이다. 협소한 정치적 상상력에서 더 협소한 중간 지대에 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위에서 떠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국면에 따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양극을 횡단할 수 있다. 이들을 움직이는 논리는 ‘둘 다 싫지만 저쪽이 더 싫다’라는 감정이다.

책임을 느끼지 않는 유권자

‘저쪽이 더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당장 내 실제 삶에 최악의 위해를 가하고 거대한 사회적 퇴행을 야기하는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세력을 지지하는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 자체의 효용을 부정해버리는 정치혐오와 ‘여야 둘 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양비론 모두에 사로잡힌 유권자는 자신의 투표 행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저쪽이 더 싫어서 투표하는 유권자 중 이런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일말의 책임감의 유무다. A 정당 후보와 B 정당 후보가 모두 싫지만 A가 더 싫어서 B에게 투표한 사람을 상상해보자. B가 당선되고 정치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최악의 실정만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면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투표를 후회하고 반성하지 않고 ‘A 때문에 내가 B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A를 더 원망하고 비난한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이른바 ‘중도층’에 소구한다는 이유로 중도를 표방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김내훈 칼럼니스트

*행재요화: 다각적으로 정치·사회·문화 담론을 비평하는 칼럼입니다. ‘행재요화’는 남의 불행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놀부 심보’를 말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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