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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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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독자가 원고료 사양한 이유는

등록 2024-06-21 22:26 수정 2024-06-28 11:25
<한겨레21> 독자 영희님이 보낸 글은 주변의 소문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여러 감정이 뒤엉켜 속이 시끄러운 모습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사진은 와이어링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신의 통합물류센터 작업자. 한겨레 자료

<한겨레21> 독자 영희님이 보낸 글은 주변의 소문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여러 감정이 뒤엉켜 속이 시끄러운 모습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사진은 와이어링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신의 통합물류센터 작업자. 한겨레 자료


“라디오에 사연이 당첨되어 전기밥솥을 받았을 때보다 곱절로 기쁩니다. 그때 저는 전기밥솥이 정말로 필요했는데도요.”

“제가 쓴 글자가 공장 밖으로 나가, 이런 잡지에 실려,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처음입니다. 매끄러운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만져보고, 냄새 맡고, 읽고 또 읽어봤습니다. 창피하지만 점심시간에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 들어가 조금 울고 말았습니다.”

“뭘 배운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김진해) 선생님께 글쓰기를 배우고 나서부터 저는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살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4주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의 글을 연재하는 ‘무적의 글쓰기’ 지면에 제1513호부터 독자 글도 함께 싣기로 했다. 김 교수가 글쓰기와 관련한 이야기를 쓰고 주제를 제시하면, 독자들이 주제와 관련한 글을 써서 <한겨레21>을 통해 김 교수에게 보낸다. 그러면 김 교수가 그 글들을 짧게 평하고, 그중 하나를 골라 <한겨레21>에 싣는 방식이다. ‘영희님’은 그렇게 지면에 글이 실린 첫 번째 독자다. 그런데 ‘영희는 공장 노동자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글의 고료를 드리기 위해 개인정보를 묻자 영희님은 정중히 고료를 사양하고 저런 회신을 보내왔다. 회신을 여러 번 고쳐 읽고 나서 나도 조금 울고 말았다.

제1514·1515호 통권호의 이 지면에 쓴 것처럼 ‘매주 한 권의 시사주간지를 만든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특히 <한겨레21>은 무엇보다 ‘목소리를 낼 권력과 통로가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매개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세계가 그렇지 않은 세계보다 더욱 평등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적의 글쓰기’ 지면에 독자 글을 싣기로 한 결정에도 그런 의지가 담겼다. 앞으로 이 의지는 다른 지면에서도 계속 확장하려 한다.

그런데 영희님의 글과 저 회신은 <한겨레21>이 지닌 의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영희님의 글과 저 회신에는 글쓰기와 배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설명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블로그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우리는 정작 우리가 온몸을 던져서 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될 수 있는지 잊은 채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글이 읽힌다는 기쁨보다는 ‘좋아요’를 통해 그 글을 쓴 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 자체만 기뻐할 뿐이다.

아울러 우리는 배움이 곧 거래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입시와 취업, 연애와 결혼, 패션과 요리는 물론이거니와 생각과 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며 기꺼이 돈을 내고 거래한다. 하지만 “글쓰기를 배우고 나서부터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살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영희님의 말을 보면, 배움은 돈이 오가는 거래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는 일이 돼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세계가 <한겨레21>에 들어오며 생긴 일이다. 그래서 <한겨레21>은 이번호 ‘무적의 글쓰기’를 통해 또 다른 ‘영희님들’의 글을 받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 또 다른 가르침을 나눌 수 있기를 앙망한다. 투고 방법은 51쪽에 담겨 있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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