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보고 읽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 어떻게 읽을까

‘구조적 읽기’ vs ‘선형적 읽기’ 도그마를 넘어… 질서 파악의 위험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
등록 2024-06-07 11:23 수정 2024-06-13 01:46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구조적 읽기'를 하지 않고 흥미 위주의 읽기만 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구조적 읽기조차 위계화된 어떤 질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구조적 읽기'를 하지 않고 흥미 위주의 읽기만 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구조적 읽기조차 위계화된 어떤 질서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구조를 파악하는 읽기는 전혀 안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읽기를 가르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하나같이 토로하는 답답함이 있다. 함께 읽기를 할 정도로 잘 만든 작품에는 잘 짜인 구조가 있는 법인데 학생들이 구조를 파악하고 구조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이를테면 진실)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조만 읽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서너 번은 읽어야 하는데, 같은 책이나 작품을 한 번 이상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자기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덕질’의 대상이 되어 마르고 닳도록 보기도 하지만 말이다.(물론 ‘보는’ 것이지 ‘읽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 번 ‘본’ 것은 지겨워하는 태도

대다수의 사람은 한 번 읽고 만다. 독서 토론을 한다고 해도 의무감으로 한 번 읽을 뿐이지 두 번 읽으며 구조와 구조를 알면 새롭게 읽히는 이야기(=진실)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책에 대해서 그럴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삶이나 관점의 레퍼런스가 되는 작품은 최소 서너 번은 읽어야 ‘읽었다’는 행위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읽었다”는 비평적 진술과 “그것은 무엇이다”라는 인식론적 진술이 가능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읽기’가 레퍼런스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르치고 있는 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자기가 한 번 올린 작품을 재해석해서 다시 무대에 올리자고 하면 꺼리는 경향이 있다. 다른 작품을 하고 싶어 한다. 한 번 올린 작품은 이미 해봤으니 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하나를 깊게 파기보다는 여러 작품을 대해보며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지만, 그보다는 한 번 ‘한’ 것에 대해서는 지겨워하는 태도가 더 솔직하게 보인다. ‘읽기’와 마찬가지로 한 번 해보는 것에 그침으로써 레퍼런스가 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엇보다 보고 읽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굳이 같은 것을 두 번, 세 번 보는 수고를 할 일이 없다. 읽을 것이 귀한 시절에야 ‘글’이라고 적힌 것은 보이는 대로 읽고 또 읽어야 했지만, 지금은 보고 읽을 것이 거의 무한대이고 그것도 거의 다 공짜에 가깝다. 보는 순간의 재미에만 몰두해도 충분한 것이 넘쳐흐르는데 굳이 구조와 진실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읽기 위해 집중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유튜브에는 읽고 파악해야 할 구조와 진실을 전문가들이 친절히 요약하고 설명까지 해주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그러니 굳이 앞에서 읽은 것을 종합하고 뒤에 나올 것을 유추하며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앞뒤를 오가며 읽고 반복하는 ‘구조적 읽기’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흐름이 지금 읽는 부분에서 어떻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지가 중요하다. 사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금’은 작품 전체와 앞과 뒤(즉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직전과 직후의 연결(즉 ‘현재진행’으로서의 지금)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읽기를 한 국어교사는 ‘구조적 읽기’와 좁은 의미에서 ‘선형적 읽기’라고 불렀다.(원래 선형적 읽기는 디지털 매체에서 하이퍼링크를 따라가는 비선형적 읽기와 대비되는 전통적인 책 읽기를 지칭하는 개념이지만 이 글에서는 선형적 읽기를 ‘구조적 읽기’와 대비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요즘은 가장 많은 읽기를 스마트폰으로 한다. 흥미에 몰두하는 `선형적 읽기'가 최적화된 매체다. 류우종 기자

요즘은 가장 많은 읽기를 스마트폰으로 한다. 흥미에 몰두하는 `선형적 읽기'가 최적화된 매체다. 류우종 기자


읽기 자체가 선형적 행위

만화를 놓고 본다면 ‘웹툰’은 출판만화와 비교해 이런 선형적 읽기에 매우 특화된 이야기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책으로 읽을 때 만화는 펼치는 순간 여러 컷이 동시에 들어온다. 적어도 두 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 시간이 한 번에 공간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한 페이지 안에서 전개되는 시간은 시각적으로 ‘구조화’되어 하나의 사건을 보여줘야 한다. 작가가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를 펼쳐진 페이지 안에서 칸의 위치와 크기, 칸 안과 밖의 인물과 말풍선 배치, 즉 공간화를 통해 말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읽기가 구조 파악을 강제한다.

반면 웹툰은 한 화면에 보통 한 컷이 배치된다. 손가락을 스크롤하는 것으로 흐름이 쭉 이어지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컷들은 만화책처럼 공간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스크롤이라는 시간적 행위의 흐름에 따라 같이 흘러간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컷의 직전과 직후의 연결이다. 이 연결이 자연스럽고 극적이어야 한다. 시간적 흐름이 뚝뚝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흘러가야 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워야 하고 그 전개가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극적이어야 한다. 공간적 시각화가 되지 않고 순간순간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더 까다롭다고도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선형적 읽기에서 지금을 직전과 직후로 연결하며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것은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이기 때문에 장소와 배경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잘 만든 만화책은 인물의 행위가 담기는 배경, 그리고 그 행위가 일어나기에 가장 최적인 필연적 장소가 세밀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웹툰은 모바일로 보는 화면 크기의 제한과 무엇보다 선형적 읽기의 특성상 장소와 배경은 존재감에서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매체의 특성이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읽기 자체가 선형적인 특성이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의 저자 조지 손더스는 <뉴요커>의 편집자 빌 뷰퍼드와의 대화를 통해 “이야기란 선형적-시간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이야기란 “한 번에 한 줄씩 진행되면서” 독자를 매혹하거나 매혹에 실패한다. 그 한 줄에 끌리는 것이 있어야만 “음, 한 줄을 읽습니다. 그러면 그게 마음에 들어요… 다음 줄을 읽어볼 만큼”이라는 뷰퍼드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지금 읽는 문장이 다음 줄을 읽어볼 만큼 매혹적이어야 하고 그게 연쇄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읽기를 지속시키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읽기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형적이라는 뜻이다.

위계화된 세계 상정하는 ‘구조적 읽기’

뇌과학자인 닉 채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의 책 <생각한다는 착각>에 따르면, 사실 인간이 구조를 읽고 생각한다는 점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이다. 읽는 순간 딱 읽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전체나 구조를 읽기는 극단적으로 말해 불가능하다. 직전-지금-직후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것의 연쇄 말고 다른 것은 없다. 뇌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연결을 통해 새롭게 창작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 착각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선형적 읽기 말고 다른 읽기는 없다.

설령 구조적 읽기가 가능하더라도 구조적 읽기의 치명적인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조적 읽기는 지금 읽고 있는 눈에 보이는 것 이면에 이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구조화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질서가 있다고 본다. 세상이 혼돈스러워 보이지만 그 혼돈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고 가정한다. 이 질서를 읽는 것을 ‘읽는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하잘것없이 보이는 것에도 질서가 깃들어 있고 이 질서를 파악하는 것이 ‘읽기’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따르면, 이런 태도를 근대 사회의 “미적 관심과 구분되는 과학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읽기는 엄밀한 과학적 태도로 객관적인 질서를 읽어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질서의 의미를 읽어내려고 한다. 이 질서는 왜 그런 질서여야 하는지, 그 질서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 순간 읽기는 과학을 넘어서 도덕·윤리적인 문제가 된다. 질서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읽어냄으로써 그것을 삶의 레퍼런스로 삼으려는 것이다. <뉴요커>의 편집자 뷰퍼드가 이야기한 한 줄이 흥미로운 다음 줄로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그래서 궁극적으로 작가가 무슨 이야기(=메시지, 즉 삶의 진실)를 하려는 것이냐에 구조적 읽기는 주목한다. 구조란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조밀한 우주(cosmos, 혼돈인 카오스(chaos)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빌드업’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현상의 이면에 질서가 있고 그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고 하면 궁극적인 진실을 얼마나 더 가깝게 체화하는지에 따라 존재가 위계화된 세계로서 우주를 상정하는 것을 피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진실에 더 가까운 존재가 있고 먼 존재가 있다. 이것은 마치 근대 이전 사람들이 신 혹은 최종적 진리와 거리를 두고 우주 전체를 위계화한 것과 다르지 않은 세계관이다.

“우리는 진실을 찾으러 온 것이라네/ 불확실한 열쇠로 신비의 문을 하나하나 열려고 시도하지/ 맹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듯/ 우리는 이곳에서 더듬으며 찾고 있다네/ 그 상형문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보이는 것에 담긴 보이지 않는 의미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이 말을 한 “미적 관심과 구분되는 과학적 관심”에 엄격했던 ‘과학자’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는 우생학자였다.

내 삶을 윤리화하는 읽기는 가능할까

그렇다면 오직 지금 읽는 행위 그 자체의 흥미에 몰두하는 선형적 읽기와 질서의 파악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위계화하고 존재를 배치하는 구조적 읽기 사이에 다른 읽기는 없는가. 삶의 레퍼런스가 되는 읽기를 위해우리는 반드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한 ‘신의 뜻’을 상정해야 하는가. 그 신앙을 가져야지만 의미에 대한 믿음을 갖고 내 삶을 윤리화할 수 있는 ‘읽기’가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읽기란 이 글에서 말한 선형적 읽기와 구조적 읽기를 넘어 오히려 질서를 파악·부여하는 행위 자체에 그런 위험이 있음을 인식하고 우주의 질서에 그런 목적과 의미란 존재하지 않음을 깊이 받아들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일까. 다시 한번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인용한다면 읽기란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고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힘, 그 힘을 키우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