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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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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가장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마음…<아 지갑놓고나왔다> 미역의효능

미역의효능① 세상의 폭력과 대면하는 여성들
등록 2024-05-25 07:26 수정 2024-05-26 08:40
카카오웹툰에서 연재중인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1화에서 자살하려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닭이 크게 울부짖고 그 소리를 듣고 여주인공 심연이 할머니의 집으로 오게 된다. 미역의효능 제공

카카오웹툰에서 연재중인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1화에서 자살하려는 할머니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닭이 크게 울부짖고 그 소리를 듣고 여주인공 심연이 할머니의 집으로 오게 된다. 미역의효능 제공


“당선작 발표일에 아무 연락이 없어서 ‘떨어졌구나’ 생각했죠. 일주일쯤 지나서 공모전을 주최한 다음웹툰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재하면 어떻겠냐고. 스토리는 좋은데 그림 때문에 뽑을지 안 뽑을지 고민했다더라고요.”

이례적인 등장이었다. 컬러 만화 시대에 흑백, 그것도 종이에 붓으로 그려나간 낯선 그림체는 웹툰의 주류 스타일과 확실히 어긋났다. 그런 원고를 붙잡고 다음웹툰(현 카카오웹툰)이라는 거대 플랫폼이 한참 씨름하게 할 만큼 미역의효능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의 힘은 컸다. 플랫폼으로부터 연재를 제안받고 2년 뒤, 그해 한국의 주요 만화상 두 개를 모두 거머쥔 작품이 됐으니 이 시작은 운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세상의 폭력과 뒤엉킨 모녀 관계 

<아 지갑놓고나왔다>(이하 <아 지갑>). 미역의효능의 데뷔작은 작가의 필명만큼이나 낯선 이름을 지녔다. 이 작품은 ‘노루’라는 아홉 살 여자아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시작한다.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노루는 이승에 여전히 머문다. 억울한 죽음 때문일까? 아니다. 노루는 죽어서도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할 뿐이다. 이 어린 딸은 엄마를 돌보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노루의 엄마 ‘선희’는 아홉 살에 사촌오빠들에게 성폭행당한 뒤 ‘얼굴’을 잃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각종 새(조류)로 보이고, 자기 얼굴은 기이한 형태로 일그러져 보인다. 내 얼굴을 잃는다는 것이 정체성의 훼손이라면, 타인의 얼굴을 잃는다는 건 사회의 붕괴다. 선희에게 성폭력보다 끔찍했던 건 성폭력 이후다. 아버지를 포함한 친족들은 모두 선희의 고통을 외면했다. 오로지 엄마 ‘경자’만이 선희의 편에 서서 폭력을 폭력이라 말했다. 그러나 경자조차도 딸이 환각을 보고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걸 이해하지 못했다. 보수 기독교 세계관에 갇힌 그녀는 선희에게 또 다른 가해자가 되고, 선희는 집을 잃는다.

임신한 채 집을 나온 선희는 홀로 노루를 낳아 키우며 새로운 집을 이룬다. 선희에게 노루는 유일하게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존재다. 노루와 있을 때 선희는 안전하다. 그러나 이 안전은 노루의 일방적인 인내를 바탕으로 한 관계다. 노루는 ‘애어른’이 되어 선희의 보호자로 살아간다. 노루의 성장은 왜곡되고 선희는 성장을 멈춘다. <아 지갑>은 이렇게 상처를 안은 여성들이 자신을 가둔 세상과 이별하고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고 마는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과 환상적 장치를 활용하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사랑과 원망이 뒤엉킨 징글징글한 모녀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는 힘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왜 이런 주제를 다루었는지 궁금해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일 거라는 가정이 깔린 질문들이었죠. ‘작가가 미혼모냐?’ 같은. 그만큼 생생한 얘기를 했다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겼어요. <아 지갑>은 대학생 때 처음 만들었어요. 그때는 <나들이>라는 제목이었죠. ‘여자아이가 죽었다. 엄마가 슬퍼한다. 여자아이가 영혼 상태로 떠다닌다.’ 딱 이 세 문장에서 이야기가 출발했어요. 연재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 터라 끝이 그렇게 가리라고는 저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관심 있게 보는 사회현상에 대한 고민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게 아닌가 싶어요.”

할머니를 구하려는 닭이 울부짖는닭! 미역의효능 제공

할머니를 구하려는 닭이 울부짖는닭! 미역의효능 제공


만화가는 내 일이 아닌 줄 알았지만

미역의효능은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복수전공 했다.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건 대학 졸업 뒤 취업을 준비하면서다.

“어릴 때부터 만화는 즐겨 봤죠. 여기저기 낙서는 계속했던 거 같아요. 그래도 저는 <원피스>(1997년부터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 중인 일본 소년 만화의 대표작)의 전성기를 보며 자랐으니까, 그런 작품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나 만화가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도 그림을 그리셨고 언니 둘도 미대를 나왔는데, 저는 평범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취업하겠다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인·적성 검사를 보러 다니는 게 괴롭더라고요. 자소서는 보통 기업에서 찾는 인재상에 맞춰야 하잖아요. 틀에 박힌 이야기를 비교적 독창적으로 보여주는 글쓰기를 계속하다 질려버렸죠. 그냥 내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어차피 사회에 나가서 내가 그렇게 유능한 직장인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잘 못하거든요. ‘합법적인 히키코모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에 만화는 적당히 좋은 핑곗거리가 돼주었죠. 마침 언니들이 입시 미술 하고 남은 재료가 집에 잔뜩 있었어요. ‘쟤들도 하는데 뭐 내가 못할 건 뭐야?’라는 자신감도 주었고.(웃음) 여자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여자들이 중심에 있는 작품. 남성 주체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있으니까.”

바라던 길에 비교적 수월히 들어선 편이었으나, 고통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이야기를 그리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원고를 그리며 힘들 때마다 울었다. 지금 돌아보면 처음이라 겁이 없고 젊어서 견뎠다 싶은 그 과정에서 마음이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 고통의 무게가 주는 건 아니다. 미역의효능은 <아 지갑> 연재를 마친 뒤인 2017년 8월 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연재의 고통과 암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언할 수야 없겠지만, 그 자신에게는 무관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 지갑> 다음 작품은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미 너무 무거운 얘기를 했으니까.”

그러나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오롯이 작가의 마음에만 달리지 않았다. 웹툰 시장 안으로 들어온 순간 작가는 플랫폼과 독자의 기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역의효능이 받아든 주문서는 “묵직한 여성 서사”였다. 그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이 땅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의 생존기를 그려내기로 했다. 2019년 연재하기 시작한 두 번째 작품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이하 <닭 위대>)이다.

“작가가 사명감을 안고 그릴 때 작품을 더 잘 그릴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이 시대를 바꾸겠습니다’라는 의지를 불태우며 펜을 들면 한 획도 못 그을 것 같거든요. 그랬다간 너무 무섭고 무거워서 도망가버릴 거 같았어요. 그래서 <닭 위대>를 그릴 때는 ‘그냥 내가 재밌는 걸 한다’는 생각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계속)

박희정 <그리고, 터지다> 저자·기록활동가

◆ <아 지갑놓고나왔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미역의효능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

좀비가 되도 출퇴근하는 사회, 대한민국 닮지 않았나요?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45.html

팁박스-미역의효능과 여성 서사

<아 지갑>이 수상작에 포함된 ‘2017 오늘의 우리만화’상의 키워드는 젠더 감수성이었다. 함께 수상한 작품인 <며느라기> <단지> <캐셔로>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은 모두 여성의 삶을 전면화하거나 페미니즘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15년을 전후로 페미니즘이 재부상하는 흐름 속에서 웹툰계에도 여성 서사가 부상했다. 한편 게임업계를 필두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와 웹툰작가들에게 ‘사상검증’을 하는 움직임도 크게 불거졌다. 단지 페미니즘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거나 사이버불링에 시달리는 일이 벌어졌다. 미역의효능도 안티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메갈작가’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

“독자분들한테 좋은 피드백을 받는 편이긴 한데, 그게 때로는 과도한 칭찬을 받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죠. 여성 서사를 한다는 이유로 공격도 받지만, 그래서 여성 독자들이 일부러 더 좋게 말해주시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여성 창작자와 여성 서사가 늘어났지만, 네이버 웹툰 1위는 ‘참교육’인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어요. 그래도 물꼬를 트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여성 서사가 계속 흥하면 좋겠어요. 저는 그 거대한 바다에 작은 파도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리스트

<아 지갑놓고나왔다> 2015년 3월25일~2017년 5월31일 다음웹툰에 연재. 2017년 부천만화대상,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아홉 살의 여름,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와 혼자 남겨진 채로 살아가는 엄마. 두 사람이 정말로 이별하는 이야기.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2019년 10월18일부터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 본격 시골 힐링라이프 서바이벌 좀비물.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대한민국 시골 마을에서 이 땅의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펼치는 위대한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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