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는 교수 최호철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다. 한 학생이 ‘19금’을 훨씬 넘는 수위의 만화를 그려서 최호철 작가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다. 그림 내용을 보면 ‘남자’ 교수로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동요 없이 인체의 근육과 골격에 따른 방향과 변화를 설명하며 그림에서 고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가르쳐줬다고 한다. ‘정성을 다함’ 이외에 만화를 대하는 그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는 어떤 만화가가 되고 싶었을까?
“동네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동네를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사연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만화가 좋았습니다. 동네라는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은 각각의 사람 이야기를 한꺼번에 담아내는 거잖아요. 저에게 동네란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총화되어 길이란 골목에 새겨진 공간과 같은 곳 같습니다. 그래서 제 그림을 보면서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가 이랬어, 내가 지나가던 거리가, 내가 타던 전철이 이랬어, 만화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푸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사람을 그릴 때가 제일 기분 좋다고 했다.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가장 기대는 지점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낱개로서의 개인이 아니다. 관계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는 관계로서의 사람을 빼놓지 않고 모두 조망하기를 좋아한다. 욕심이 많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담기는 공간을 사람들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제각각 살아 있으면서 총화되는 장소로 그려낸다. 이를테면 누군가에게 전철은 이동하는 수단 내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연이 교차하며 동시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소다.
“을지로 순환선은 아주 작은 그림입니다. 그 작은 그림 안에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을 다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서서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 혼자 졸고 있는 지친 학생, 멍하니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서로 기대고 있는 연인, 심심해서 창밖을 보고 있는 아이, 그리고 그 창밖으로 펼쳐지는 을지로 순환선이 지나가는 서울의 외곽 풍경. 그래서 360도 풍경으로 담아냈습니다. 그 공간을 조망하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제 시각 경험을 한 장의 그림에 다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저는 역시 사람이 채워져야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관계망 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서로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의 인연은 없을지라도 어쨌든 다 인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연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것이 동네 혹은 장소가 아닐까 합니다. 을지로 순환선 같은 경우에는 저 전철을 채운 사람들을 통해 서울의 외곽이 어떤 곳인지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다. <1970년 청계 고가도로>도 그렇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부터 길가에 주저앉아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 길을 건너는 청소년, 머리에 짐을 진 음식 장사하는 아주머니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 가득 찼다고 해서 장소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사람이 공간에 묻히지 않고, 사람이 제각각 존재감을 드러내도 공간이 밀리지 않는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보이고 사람을 통해 그 장소의 이야기가 들린다. 그에게 사람이란 개인으로 흩어지지도, 통계학적 숫자인 인구로 흡수되지도 않는다. 최호철 작품의 가장 빼어난 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탁월한 인류학자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태일이>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사연팔이’ 아닌 새 이야기 양식을 찾아서(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528.html)◆
여행이고 기록이고 독서다. 그는 어디를 가나 펜과 노트를 들고 간다. 그리기 위해 그는 떠난다. 사람부터 건물, 길거리의 비루먹은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밀려나 사라져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을 빠뜨리지 않고 그린다. 그리기 위해 그는 그리려고 하는 대상을 읽는다. 얼굴과 몸, 차림새와 표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인연, 그리고 마을과 거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흔적과 무늬를 읽는다. 그에게 크로키는 사람의 무늬[人紋]를 읽는 독서다. 그렇게 그는 크로키로 그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책으로 대하고, 책으로 지어낸다.
그에게 크로키는 작품을 위한 밑그림이나 연습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며 말 걸기의 방식이다. 그가 크로키를 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그는 크로키를 그릴 때마다 상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저기 죄송한데 이렇게 해도(그려도) 되겠습니까?” 그림의 대상이 흔쾌히 “좋아!”라고 말하면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제 집에 편히 머무르세요.” 그의 크로키는 세상 만물을 환대하고 머무르게 하는 그의 게스트하우스다.
<태일이> 2009년 전 5권으로 돌베개에서 완간. 부천만화대상 수상. 20여 년을 마음에 담고 있던 작품으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등을 바탕으로 전태일의 실제 삶에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을지로 순환선> 2008년 거북이북스 펴냄. 그림일기장으로 봉천동 달동네, 신도림역, 와우산길, 수지 가구공단, 버스기사 아저씨, 일본 대사관 앞 등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최호철의 걷는 그림> 2010년 두보북스 펴냄. 25년간 그려낸 130여 권에 이르는 크로키 북에서 간추려낸 크로키들로 구성된 이 책은 평범한 삶의 모습을 진솔하고 재치 있게 담아냈다.
<펜 끝 기행> 2010년 디자인하우스 펴냄. 같은 대학 교수인 만화평론가 박인하와 함께한 여행기. 일본, 이탈리아, 스위스, 중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에서 마무리. 두 사람이 바라보는 만화적인 세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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