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2006년 봄 서울아산병원과 서울대학교병원에 급성 간질성 폐렴 증상을 보이는 어린이 환자 15명이 무더기로 입원했다. 2011년 2~4월엔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 폐렴 증상을 보이는 산모가 잇달아 입원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연구진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위험 요인을 지워나갔다. 사태의 원인은 하나로 모였다. 가습기살균제였다.
환경사회학 연구자 박진영의 <재난에 맞서는 과학>(민음사 펴냄)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다룬 책이다. 2023년 10월 말까지 피해 신고자 7877명 중 1835명이 사망했다. 159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 304명이 사망한 세월호 참사보다 훨씬 서서히, 넓은 범위의 희생자를 낳아 ‘느린 재난’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과학, 정치, 자본, 피해자와 행정이 부딪치는 장이었다. 1994년 출시된 가습기살균제는 1천만 개 가까이 판매됐다. 지식, 법, 제도는 참사가 벌어지고 한참 뒤에 당도했다.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 환경부, 보건복지부 모두 머뭇거렸다. 기업과 행정부는 제품과 피해 사이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2016년 서울중앙지검이 전담수사팀을 구성하자 기업들은 부랴부랴 사과 입장을 발표했다.
과학은 생각보다 깔끔하거나 완벽하지 않다. 기업의 뜻에 따라 연구결과를 조작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옥시가 발주한 거액의 연구용역을 맡은 전문가들은 ‘청부 과학자’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 지옥 같은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해자와 연대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여러 전문가가 가습기살균제의 유해성과 인과관계를 합의하고 증명했음에도, 법정에서 이 결과는 다시 검증해야 할 쟁점이 돼버렸다. 2021년 형사재판 1심 결과 기업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4년 1월11일 2심 선고를 앞두고 과학자들은 가습기살균제 노출과 건강피해 간 과학적 근거를 사법부가 고려하기를 촉구했다.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유통, 판매한 에스케이(SK)케미칼, 애경, 이마트에 가습기살균제 피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선언되기를 기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과학지식을 만드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회적 재난과 함께 살며 과학과 정치를 대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판결에 분노하며, 세월호 참사의 피해를 애도하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에 입장을 세우며 말이다. (…) 우리가 손을 들고 과학에 대해 말할 때 세상이 바뀐다.” 재난에 맞선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과학에 말을 얹고 손을 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1만7천원.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페미니스트 킬조이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아르테 펴냄, 3만2천원
<감정의 문화정치>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행복의 약속> 등으로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아온 철학자이자 활동가 사라 아메드의 책. 즐거움을 죽이는 ‘페미니스트 킬조이’는 우습지 않을 때 남을 따라 웃지 않고, 기꺼이 성가신 존재가 되며,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는 유대는 과감하게 부러뜨린다. 권력의 즐거움을 망치면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연결된 존재다.
권력과 공간
미셸 푸코 지음,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1만4천원
푸코의 권력론을 공간 인식 차원에서 보여주는 글을 묶었다. 1976년 푸코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했던 강연을 옮긴 ‘권력의 그물코’, 자크 랑시에르와 한 서면 인터뷰 ‘권력과 전략’, 이탈리아 공산주의 철학자 마시모 카치아리의 비판에 대해 내놓은 글 등을 실었다. 미국 애티카 감옥 봉기에 관한 생각, 지리학에 관한 인식도 만나볼 수 있다.
전쟁과 학살을 넘어
구정은·오애리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1만7500원
우크라이나 전쟁과 분쟁이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룬 책. 1부에선 민주주의를 향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힘겨운 여정과 러시아라는 존재를 설명한다. 2부에선 분쟁의 땅이 된 팔레스타인과 문제적 양국 지도자들, 국제사회가 본 중동전쟁 등을 다룬다. 3~5부에선 시리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검토한다.
방황하는 소설
정지아 등 지음, 창비 펴냄, 1만7천원
‘방황’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 7편을 엮었다. 정지아, 박상영, 정소현, 김금희, 김지연, 박민정, 최은영 작가가 쓴 방황의 이야기. 기억상실로 인한 방황, 사회초년생의 방황, 트라우마, 인간관계로 인한 방황 등 다양한 나이대의 인물이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나간다. 창비교육에서 출간하는 테마 소설 시리즈 열한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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