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를 거스르는 따뜻함이 불길한 겨울 오후, 누가 받을지 모르는 엽서를 썼다.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송년회에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익명의 수취인과 덕담을 담은 엽서를 써와서 서로 교환하는 의식이 몇 해째 고정 프로그램이 됐다. 보통 편지를 쓰는 동안엔 받는 사람 얼굴을 두둥실 띄워놓기 마련인데, 모르는 사람에게 써야 할 땐 잠시 헤매게 된다. 특정한 인물 대신 그냥 사람, 개인, 시민을 떠올리는 게 어쩐지 매달 이 칼럼을 쓰는 일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에는 어떤 내용을 적어야 할까? 올해는 엽서에 자신이 누린 ‘공공의 행복’을 적어달라는 과제가 더해졌다. 이번 송년회가 2023년 5월 열었던 ‘공공을 찾아라’ 행사의 후속 모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제1463호 ‘베이글을 구우며 생각한 ○○에 대하여’를 참고해주시길). ‘공공의 연말, 공공의 양말’이라는 장난스러운 제목으로 다시 한번 초대장을 띄웠다. 빵집 ‘콩플레’의 비건 샌드위치와 수프, 식문화 플랫폼 ‘벗밭’ 멤버들의 즉석 팝콘, 카페 ‘닷콤’의 수제 에이드와 발효카페 ‘큔’에서 공수한 수도원 맥주를 곁들이니 더욱 풍성해졌다.
테이블 대화를 위해 동료는 “도넛식 회고 질문” 두 개를 제안했다.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창안한 ‘도넛 경제학’에서 영감 받은 것으로, 여기서 ‘도넛’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사회적 기초와 지구의 생태적 한계 사이 공간을 그려낸 모형을 말한다. 모든 곳에서 적정한 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돕는 획기적인 도구다. “올해 내 삶에서 지나치게 많았던 것과 너무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새해에는 서로에게 어떤 도움을 구하고 싶나요?”
우리는 너무 많은 변화, 행사, 이동, 일 그리고 너무 적은 활기, 재미, 시간, 정치적 관심, 집밥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도움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백도. 이어서 엽서 교환식이자 기둥에 붙여 만든 ‘양말 트리 해체쇼’가 시작됐다. 앞에 나와 엽서를 무작위로 골라 읽은 뒤 맘에 드는 양말을 골라가는 식이다. 공공기관의 창작지원금, 동네 도서관과 도심 속 텃밭에서 보낸 시간, 생협 배달노동자에게서 받은 위로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 이들의 미소 띤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낭독 끝 작성자가 밝혀지기 전 쑥스러운 표정으로 있는 사람도 찾아본다.
앞선 테이블 대화에서 풀어둔 각자의 고민에 걸맞은 말을 골라잡는 게 신기했다. 내게 온 엽서에는 12월7일 세상을 떠난 김민아 노무사를 추모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노동자의 편에서 힘쓴 노무사이자 응원이 필요한 일하는 여성들의 지지자, 해맑은 투쟁가”에게서 전해 받은 “환대의 마음”을 모르는 내게도 기꺼이 전한다고. 마침 오는 길에 그분의 부고 기사를 읽은 참이었다. 생전 만나뵌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그분과 연결된 것에 감사했다. 그분의 자취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에이미와 이저벨> 속 문장을 모두와 나누고 싶어 엽서에 옮겨 적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508쪽)
공공의 행복이라곤 떠오르지 않는 한 해를 돌아보며 씁쓸한 마음이 더 크더라도, 따뜻한 양말을 신고 계속 나아가보자. 남은 올해에도, 내년에도.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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