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그동안 안 잡은 거잖아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에 게시된 살인예고 글 443건의 수사에 착수해 192건과 관련한 201명을 검거하고 20명을 구속했다는 소식(2023년 8월22일 오전 기준)을 들은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의 말이다. 이들은 그간 경찰서를 찾아가면 “추적이 어렵다” “알아서 조사해 와라” “당하면 신고하라” 같은 말을 들으며 문전박대당했다. 이런 피해자들 처지에선 게시 뒤 단 몇 초 만에 삭제된 글의 작성자도 검거할 능력이 경찰에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다.
검경은 살인예고범들에게 협박,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의 처벌 규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나아가 살인예비죄 적용까지 검토한다. 학계도 온라인에서 범행을 예고하는 게시물 중 10% 정도는 실행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이제야 움직이는 수사기관을 보며 그간 숱하게 살해·강간 등의 위협에 노출됐으나 보호받지도, 수사조차 개시되지도 않았던 많은 사건의 피해자들이 떠오른다. 그때도 그런 게시물은 ‘장난’이 아니었고, 실행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들은 고통받았다.
뒤늦게 수사기관을 움직인 것은 2023년 7월부터 잇달아 발생한 ‘흉기 테러’와 ‘페미사이드’(여성살해) 사건으로 들끓는 여론이다. 7월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조선이 벌인 흉기난동은 강력범죄가 사회적 약자만을 대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님을 확인한 계기였다. 그간 ‘남초’(남성 이용자가 많음) 사이트 회원들은 ‘한국은 치안 강국’이라는 점을 내세워 여성들의 페미사이드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조롱했다. 하지만 이들은 신림동 사건에서 젊은 남성들이 살인 피해자가 되는 모습을 본 뒤 충격을 호소하거나 호신용품 구매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8월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에서 최원종이 저지른 흉기난동은 2008년 일본 도쿄 전철 아키하바라역 부근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상 사건’(일본 법무성 표현)을 연상케 했다. 두 사건의 범인 모두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 한복판에서 차량과 흉기로 시민을 공격했다. 또한 범인들은 오프라인 사회 관계망이 박살 난 채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집착하며 왜곡된 사회 인식을 강화했고, 살해 예고 뒤 범행을 저질렀다. 8월17일 최윤종이 서울 관악구 등산로에서 벌인 강간살인은 전형적인 페미사이드다. 그는 여성을 강간하겠다는 범행 목적을 갖고, 이전에 자주 다녀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곳을 범행 장소로 선택했다.
수사기관과 언론은 범죄자의 개인적 지점을 범죄 발생 원인으로 설명한다. 조선은 게임중독, 최원종은 조현성 인격장애(분열성 성격장애), 최윤종은 우울증 등을 부각하는 식이다. 그들이 지녔다는 취약성이 어떻게 공격성으로 발현됐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찾아보기 어렵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은 범죄 원인의 다각적 분석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범죄 원인을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외부에 신중하게 공표해야 함을 의미하는데도, 수사기관과 언론은 이런 기본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사회와 완전히 유리된 채 등장한 게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는 온라인 관계망도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디지털 환경이 잘못 조성·관리될 경우 이 환경에 강한 영향을 받는 취약한 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향한 공격성을 키우기 쉽다.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에서 활동했던 피해자들은 자살로 내몰리기도 했다(제1461호 “진화된 n번방’ 우울증갤러리… 피해자 취약성 악용해’ 참조). 온라인에서 ‘살인예고’ 행위가 일종의 밈(온라인 유행 콘텐츠)이나 ‘챌린지’처럼 퍼지는 현상은, 한국 사회와 수사기관이 혐오 가득한 디지털 공간을 ‘쓰레기통’ 정도로 치부하며 방치해온 과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윤석열 정부는 ‘여성가족부 폐지’ ‘성범죄 무고죄 강화’ 등 혐오와 차별이 일상화된 인터넷 커뮤니티의 입장을 대선 전략으로 내세워 탄생했다. 혐오와 차별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개인 문제로 돌리는 상황에서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겠는가. “한국 최초 여성안심귀갓길 전면 폐지”를 치적으로 내세운 최인호 관악구의원(국민의힘)의 의정활동도 온라인 반여성주의가 제도권으로 들어와 보편적 안전망을 망가뜨린 사례 중 하나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도 “여성이 밤길을 걷기 싫어하는 이유가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보행환경에서 비롯됐다’고 말하는데 이는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8월23일 “치안 업무를 경찰 업무의 최우선 순위로 두겠다”며 2017년 폐지된 의무경찰제 재도입과 절대적 종신형(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사법입원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사회 각계에서 주장해온 정책 개편안들을 무시하다가, 뒤늦게 생색내기용 발표로 무마하려는 국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큰길로 다녀도 사고(범죄)가 나고, 산책로로 다녀도 사고(범죄)가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최윤종 사건의 피해자 유족이 장례식장에서 한 말이다. ‘각자도생 시대’라며 자조하는 말로 지금을 표현하기엔, 취약한 이들은 오늘도 일상과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트라우마 치유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2~3주지만, 한국 사회는 연이은 범죄들로 트라우마를 치유할 틈이 없다. 재경험, 과각성, 회피, 해리 등 트라우마의 대표적 증상들은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사회적 약자의 불안과 공포를 피해망상으로 취급하며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면, 보편적 안전망이 무너져 더 많은 시민이 희생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시스템이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설계·운영돼야 다른 이들도 그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다. 더는 시민의 생명과 일상을 담보로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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