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연락망을 확인하고, 고위험군인 주변인에게 연락할 것.”
성폭력 피해자 연대 활동을 하면서 매해 3~4월과 10~11월에 강조하는 일이다. 봄과 가을에는 계절성 우울증 등 여러 요인이 겹쳐 자살 고위험군인 피해자들의 심리가 불안해지기 쉽다. 이런 취약한 이를 대상으로 성착취를 시도하는 가해자가 존재하기에, 이 시기에는 연대·감시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한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고층 건물에서 10대 여성이 추락해 숨졌다. 이 청소년이 생전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당 갤러리의 성인 남성 이용자들에게 성착취 피해 등을 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 3년여간 우울증갤러리 이용자 10여 명이 자살했다는 여러 증언이 언론에 보도됐다. 경찰은 2023년 4월24일 서울경찰청 여성청소년과, 형사과, 사이버수사과 등을 포함한 전담팀(TF)을 구성해 우울증갤러리와 관련한 각종 범죄 의혹(‘신대방팸’ ‘신림팸’ 등 우울증갤러리 연관 모임의 약물 이용 범죄, 성범죄, 청소년 자살 예방 규정 위반 정황 등)을 살필 것이라고 밝혔다.
주변에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자신의 우울감이나 자살·자해를 암시하는 글을 온라인에 게시해 타인에게 위안을 얻으려는 10대와 20대가 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 사례도 늘고 있다. 가해자는 상대의 취약성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척하며 피해자와 신뢰관계를 형성한 뒤 폭력을 행사하며 피해자를 착취·통제한다. 이러한 ‘그루밍 성범죄’가 각종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과 맞물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익명 참여가 가능한 오픈채팅방 등에서 자신의 성별·나이·직업 등을 속이고 취약한 피해자를 찾는 성착취·성폭력 가해자는 이전에도 있었다. 2020년 이후 중형을 선고받은 디지털성범죄자 상당수가 이런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들이 일대일의 폐쇄적이고 내밀한 관계 유지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이번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는 조직적·집단적 범죄의 모습까지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울증갤러리 자체가 취약한 피해자와 착취범의 연결 창구이며, 착취·폭력의 전시와 관전이 스스럼없이 이어지는 곳이자, 각종 ‘자살 유발 정보’(자살 동반자 모집, 구체적인 자살 방법 제시 등)가 여과 없이 공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는 이른바 ‘진화된 엔(n)번방’이라 명명될 정도로 온·오프라인의 각종 성착취·성폭력과 약물 등의 문제가 결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디시인사이드가 ‘디지털성범죄 창구’가 된 것은 우울증갤러리가 처음도 아니다. 2019년 ‘수갤’(수능갤러리) 등에서 n번방 홍보가 이어졌고, 2021년 게시글에 동영상 첨부가 가능해지면서 ‘야갤’(야구갤러리) 등은 ‘n번방 영상’이라며 각종 불법촬영물로 도배되기도 했다. 디시인사이드 자체의 자정과 자율적 관리·감독은 처참한 수준이다. 이번 우울증갤러리도 자살 유발 정보에 대한 대처나 고위험군 이용자에 대한 주의 등은 찾아볼 수 없고, 이용자의 저작권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었다.
우울증갤러리 청소년 이용자의 사망 뒤 경찰은 2차 피해와 모방범죄 등에 대한 우려로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 임시폐쇄를 요청했지만, 디시인사이드는 ‘표현의 자유’와 ‘이용자의 저작권 보호’를 이유로 거부했다. 해당 갤러리를 폐쇄하면 이용자가 다른 갤러리로 유입되는 ‘풍선효과’가 생겨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는 변명과 함께, 이용자 성인 인증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에 갤러리 일시 차단을 요청한 상태다. 방심위는 온라인상 불법·청소년유해 정보를 심의해 사업자에게 시정(삭제·접속차단 등) 요구할 수 있다.
“진짜 죽어야 할 것 같았어요.”
트위터에서 우울증을 털어놓는 개인 계정을 운영하다가 디시인사이드 우울증갤러리를 알게 돼 잠시 활동했다는 한 피해자의 말이다. 그는 갤러리에서 친분을 쌓은 한 성인 남성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갤러리 활동을 하던 때 그는 우울증이 더 악화했고, 약물도 남용했다. 공감과 이해를 구하기 위해 한 갤러리 활동이 그를 더욱 취약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는 부모 등 가족에게 상황을 알릴 수도 없었고, 전문가의 조력도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가해 남성이 또 성관계를 요구하면서 자살 시도를 여러 차례 했다.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힘을 얻으려 소통했던 이들이 결국 본인을 착취 대상으로 보고 가해한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을 탓하던 피해자는 성인이 된 뒤에야 자신의 피해를 똑바로 인지했고, 좀더 안정되면 고소 등을 할 생각이란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울증 유병률이 1위(36.8%)지만, 중증 우울증 치료율은 11.2%에 불과하다(2020년 기준). 10대와 20대의 자살률도 높아, 20대 사망 원인 중 자살 비중이 56.8%에 이른다(2021년 기준). 모방자살 위험도가 20대 여성 집단에서 가장 높은 수치(전체 평균 대비 약 2.31배)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김남국·황정은 교수팀). 우울증과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취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성착취하고 약물을 권유하는 등 더 취약한 상태로 몰고 가는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런 가해자들의 사냥터로 전락한 온라인 플랫폼의 관리·감독 책임을 강력히 물어야 한다. 자살·자해·우울증 등을 개인 문제로 축소해 그런 취약성을 이용한 범죄에 소홀하게 대처해온 수사기관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우울·자해·자살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예방·치료 시스템 정비 등도 필요하다. 아프고 취약한 이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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