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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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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이 불러온 ‘데자뷔’…우리는 평화로 가지요

2023년 통일선봉대를 보며 생각난 1991년의 남북 학생기자들
등록 2023-08-18 23:05 수정 2023-08-19 10:13
8·15자주통일선봉대 소속 청년 학생들이 2023년 8월12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8·15범국민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우리는 가지요>란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8·15자주통일선봉대 소속 청년 학생들이 2023년 8월12일 서울 광화문 앞에서 열린 8·15범국민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우리는 가지요>란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여길 언제 왔었지? 제법 익숙한데….” 어느 골목 어귀에 들어섰을 때 불현듯 이런 느낌이 들곤 한다. 이렇게 처음 맞는 장소•장면•경험을 이미 겪었던 것으로 느끼는 심리상태를 데자뷔(Deja-vu), 즉 우리말로는 기시감이라고 한다.

현대 의학에선 이런 현상을 ‘과거에 보고 싶어 했던 것’ ‘누군가한테서 들은 것’ 따위가 잠재해 있다가 어느 순간 현실과 겹쳐져 나타나는 기억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한다. 한데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을 멈춰 시각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진 찍기’ 행위에는 이런 데자뷔 같은 지각 장애가 카메라를 들게 하는 동기로 작동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하는 마음으로 미리 렌즈를 겨누고 숨을 고르다, 이미 보았던 듯한 장면에서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흐뭇해진 입술을 달싹이며 되뇐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2023년 8월12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옆 도로에선 ‘8·15 전국노동자대회’와 ‘윤석열 정권 퇴진 범국민대회’ 그리고 ‘광복 78주년 8·15범국민대회’가 잇따라 열렸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민주노총 등의 시민사회노동단체가 태풍 ‘카눈’이 소멸하며 흩뿌린 빗속에 도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한자리에서 30분 간격으로 이어진 집회 중 마지막 8·15범국민대회가 범국민행진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무대에 올랐다. 파란 티셔츠의 가슴에 ‘오염수 투기 우리가 막아내자’는 글귀가 큼지막이 적혔다. 통일선봉대를 자처한 이들은 <우리는 가지요>란 노래에 맞춰 율동을 했다.

“우리는 가지요. 그렇게 가지요. 너와 나 우리 함께 가지요. 새벽별 쓰라린 가슴 안고 그렇게 우린 걸어가지요. 맑은 빛 어둠 속에 사라져 진실이 외로움에 흔들릴 때 내 어깨 잡아주던 그대 손 당신은 나의 사람입니다.”

며칠 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8·15 경축식 연단에 선 윤석열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고 말했다. 이른바 광복절 경축사다.

1960년 4·19혁명의 주역이던 학생들은 이듬해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며 통일운동의 선봉에 섰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평화의 깃발을 내려놓아야 했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맞은 해빙기에도 청년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요구하며 판문점을 향한 도로에 어깨 겯고 누웠다. 같은 해 8월12일엔 남북 학생대표가 남쪽의 방북 취재를 협의하려고 실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마주 앉기도 했다.

청년들이 놓은 밑돌 위에 2000년 김대중, 2007년 노무현,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비핵화와 종전협정을 향해 가던 평화의 시계는 다시 멈췄다. ‘힘에 의한 평화’를 앞세운 남북 당국은 미사일 발사 실험 대 미국 보유 핵전력 자산을 동원한 군사훈련으로 맞서고 있다.

이제 종전과 평화를 말하면 ‘반국가 세력’으로 몰릴 판이다. 이를 내다본 듯 광복절을 앞두고 열린 집회의 이름은 ‘광복 78년 주권훼손 굴욕외교 저지! 한반도 평화실현! 8·15범국민대회’였다. 그리고 청년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연대의 노래를 부르며 춤췄다. 어디서 이미 본 듯하지 아니한가.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woohani@naver.com

1991년 8월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쪽 학생기자들의 방북 취재를 위해 만난 남북 학생대표들.

1991년 8월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쪽 학생기자들의 방북 취재를 위해 만난 남북 학생대표들.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데자뷔’ 연재를 시작합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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