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일장인 일산시장에서 2025년 2월13일 오후 6시30분께 장을 보러 나온 주부들이 오가고 있다. 야채를 파는 상인들이 얼마 남지 않은 채소류를 정리하고 있다.
아파트가 밀집한 수도권 역 주변에 100년이 훨씬 넘은 오일장이 선다. 3과 8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일산장이 그곳이다.
일산시장은 경의선 철도가 개통된 1906년 문을 연 것으로 전해진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해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건설하던 1904년 일산역은 역무를 시작했다. 부분적으로 운행하던 경의선은 1906년 4월3일 용산에서 신의주까지 전 구간에 걸쳐 열차가 운행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다.

시래기와 나물류를 삶아 팔러 나온 할머니가 장 보러 나온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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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 완전 개통과 함께 일제가 면사무소를 일산으로 이전하며 장이 서고 점차 커졌다. 1911년 ‘조선총독부철도국’이 펴낸 ‘조선철도 발간 안내’에 “일산역 앞에 매 5일과 10일에 장이 개시되면서 1천여 명이 모여 주로 쌀·콩·소금·담배·무명을 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산동 서쪽으로 한강변에 자리한 대화동에는 사포장이 열렸다. 서울 마포장~고양~개성으로 선박의 이동 경로를 따라 열렸던 사포장은 일산장이 커지면서 통합됐다. 일산 주변에 농경지가 많아 농산물 유입이 풍부해지자 주변에 우시장까지 들어섰다. 이때부터 성남 모란시장, 김포 북변 오일장, 파주 문산 오일장과 함께 경기도 4대 오일장으로 불렸다. 지역 경제의 버팀목이 될 정도로 세를 불린 일산장은 상설 점포가 들어서기 시작한 1981년 시장 번영회가 거리 정비와 함께 장날을 3일과 8일로 바꿔 열기 시작했다.

일산시장 한쪽에 천막을 치고 자리잡은 금거래소. 최근 크게 오른 금 시세가 적혀 있다.
1989년 서울의 집값 폭등을 잡기 위해 1기 신도시로 분당·평촌·산본·중동과 함께 일산이 지정됐다. 일산 신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져 입주를 시작한 1992년, 경의선 철로를 경계로 일산역과 일산시장 주변은 신도시 밖에 자리해 ‘구일산’이라 불리게 된다. 일산장은 상설시장으로 자리잡은 일산시장 주변 도로와 빈터·골목에서 열린다. 해서 전국 장터를 돌며 장날에 천막을 치고 손님을 맞는 이른바 ‘장꾼’ 또는 ‘장돌림’은 자기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들과 협력해야 한다. 상점 앞을 일정 부분 가리고 물도 써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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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놓인 매대 위의 막 삶아낸 족발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오일장에는 장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꾼 외에도 이웃에서 자신이 가꾼 채소류나 곡물을 팔러 나온 주민들이 있다. 자신의 밭에서 딴 무청으로 시래기를 만들어 삶아 내온 할머니도 있고, 부부가 함께 검정콩·완두콩·감잣가루·메밀가루 몇 자루를 좌판에 내놓기도 한다. 하필 노부부가 함께 장에 나선 2025년 2월8일 일산의 최저기온은 영하 17도까지 떨어졌다. 손님 맞기보다 칼바람을 막아줄 작은 천막을 치는 일이 급하다. 순식간에 곱아 말을 안 듣는 손으로 어찌어찌 천막을 치고, 프로판가스 난로를 틀어 간신히 몸을 데운다.

노부부가 어렵사리 천막을 치고 있다.
한쪽에선 가마솥에서 방금 삶은 족발을 매대에 올려놓는다. 기록적인 한파에 족발에서 더욱 짙게 피어오른 수증기가 행인의 시야를 가린다. 장날 천막 한 귀퉁이에 자리한 ‘금거래소’에 눈길이 닿는다. “금이빨·은수저를 인터넷이나 금은방보다 고가에 매입합니다”란 홍보 글귀에 집에서 뭐라도 하나 가져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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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경계를 비켜 갔던 구일산에도 개발 바람이 불었다. 2022년 일산역 바로 앞에 49층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3개 동이나 들어섰다. 그 전에도 재개발조합이 지은 소규모 아파트단지가 좀 떨어진 곳에 지어졌지만 바로 시장을 마주하고 프랜차이즈 상점이 가득한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선 것은 처음이다.
2월13일 저녁 다시 찾은 일산장은 파장 분위기였다. 이날은 수은주가 다소 올라 최저기온이 영하 12도에 머물렀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었는데 상당수 상인이 천막을 걷고 있다. 채소류와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은 “떨이”를 외치며 장 마감을 서두른다.
경의선과 탄생을 함께한 일산장, 남북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이어졌던 경의선이 다시 끊긴 이제 어떤 길을 걷게 될까. 북으로 향한 열차는 멈췄지만, 서해선 연결 등 경기 남서부와 왕래가 빨라진 일산역의 배후 시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까마득히 높은 신축 아파트 창에 하나둘 불이 켜질 때 천막 노점의 불은 꺼져가고 있었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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