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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에 ‘기다리다 죽겠다’ [노 땡큐]

등록 2022-10-26 15:23 수정 2022-12-09 17:3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빈곤사회연대의 옛 사무실 근처에는 라면집이 하나 있었다. 분식집이 아니라 ‘라면 전문점’이라는 이름만 걸고 있는 이 가게는 정말 라면만 판다. 짜장라면, 비빔라면을 비롯해 온갖 라면만을 끓여주는 이 가게의 숨은 주연은 깍두기다. 집에서 끓인 것과는 영 딴판인 라면도 맛있지만 새콤매콤한 깍두기가 일품이라 서비스로 놓인 밥을 한술이라도 꼭 뜨게 된다.

급한 일이 없어야 한다

하루는 요리사인 주인 할머니께 깍두기 만드는 비법을 물었다. 할머니의 첫 번째 비법은 일단 깍두기 담글 때는 급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쁜 일을 뒤에 두고 시작하면 무 상태를 보지 못하고 시간에만 쫓기기 때문이다. 무가 자란 계절과 환경마다 머금은 물기도 성글기도 다르기 때문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만난 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아가며 담가야 한다. 두 번째 비법은 액젓과 소금,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휘휘 젓는 일이다. ‘넣은 듯 안 넣은 듯’한 뉴슈가 한 꼬집이 두 번째 비법의 핵심인 것 같다. 마지막 비법도 시간과 관계있다. 익었다 싶을 때 남김없이 잘 먹는 것, 최애 라면 가게 맛있는 깍두기의 비법이다.

한 단체에서 12년간 활동하다보니 내 일년살이는 단체의 한 해 사업을 닮게 됐다. 보통 사람들은 12월31일에 한 해를 끝내지만, 나는 1월20일 ‘용산참사 추모제’를 치른 뒤에야 한 해가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한 해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때는 10월17일 ‘빈곤철폐의 날’이다. 한 해 동안 있었던 다양한 빈곤 이슈를 정리하고, 알리는 시간이다. 2022년 ‘빈곤철폐의 날’을 준비하며 한 해를 돌아보니 무엇보다 올해를 관통하는 이슈는 단연 주거권이었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어디에 사는지가 기후위기 시대 새로운 재난의 도화선이 되고 있으니 여느 때보다 주거권에 대한 관심이 비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해를 정리하는 때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약자와의 동행’을 첫 번째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대통령이 2023년도 공공주택 관련 예산을 2022년 대비 27% 삭감했다. 삭감한 금액은 5조7천억원.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국민임대주택부터 매입임대주택까지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 예산이 뭉텅이로 삭감됐다.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정말 많은 사람의 눈물밥을 먹고 자랐다. 1989년에 도입된 영구임대주택 정책의 배경에는 집값 폭등에 상심해 목숨 끊은 세입자, 도시 미관을 정비한다며 밀려난 판자촌과 달동네 주민들의 투쟁이 있었다. 공공임대주택은 그 뒤 미약한 발전을 거듭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오르는 집값이나 이 때문에 더 커진 빈부격차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지금도 쫓겨나는 사람들에 견줘 공공임대주택은 늘 너무 적은 수준이다.

올해 빈곤 이슈 ‘주거권’, 국회는 응답하라

이 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하게만 보이는 이유는 지금이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하는 적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우리는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고시원에 사는 야학학생 강아지(별명)님은 임대주택을 신청하고 2년째 대기줄에만 올라 있어 ‘명 짧은 이 기다리다 죽겠다’는 손팻말을 들고 ‘빈곤철폐의 날’ 행진에 참여했다. ‘약자와의 동행’을 외치는 정부와 강아지님은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일까. 지금 예산을 삭감하고 할 수 있는 2023년의 주거복지는 없다.

바쁜 일이 없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깍두기 레시피를 따라 우리도 뒷일은 모두 제쳐놓기로 했다. 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모여 10월17일 ‘빈곤철폐의 날’ 국회 앞에 농성장을 마련했다. 이제 국회가 응답할 차례다. 국회의 시간표는 핑계가 될 수 없다. 세입자의 필요에 응답하라.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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