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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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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브로콜리 억지로 먹이셨군요

등록 2024-07-12 16:57 수정 2024-07-18 15:48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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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방학이다. 길지도 않은 여름방학인데 맞벌이 부모는 그저 곤혹스럽다. 당장 아이를 봐줄 곳이 마땅치 않다. 물론 학교에서 돌봄 교실을 연다. 단, 신청자가 많으면 우선순위에 따라 선발하거나 무작위 추첨한다. 또 학기 중과 달리 하교가 더 빠르고, 급식이 나오지 않는다. 커리큘럼은 교실마다 다르지만 종이접기, 교육방송(EBS) 시청 등 대개 실내 활동 위주다. 일하는 부모의 고민은 끝이 없다. 여름인데 도시락은 뭘 싸주지? 종일 교실에 있으면 답답하지 않을까? 여러 학년이 함께 지내는데 괜찮을까? 공부는 언제 하지? 그나마도 추첨에 떨어진 부모들은 답이 없다.

어른이 채우는 아이의 시간

부모의 시름을 기민하게 소비자 니즈로 읽어낸 사교육 업체는 일찌감치 방학특수를 선점했다. ○○캠프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단기 특강이 그것이다. 배달 도시락으로 점심까지 주는 곳은 더 인기다. 선생님이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방문형 돌봄 서비스도 있다. 아이의 오감을 자극한다는 최신 교구를 가져오고, 원하면 영어로 놀아주기도 한다. 결국 방학 계획은 아이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 재량을 따라간다. 재량은 보통 재력에 달려 있다.

아이는 시간도 많고 하고 싶은 것은 더 많지만 어떻게 방학을 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자율적으로 계획을 세워 시간을 보내라고 준 기회가 방학인데 오히려 주체성을 잃는다. 늘 시간에 쫓기는 부모는 별 도리 없이 ‘대세’를 따른다. 만족스러울 리 없는 상황에 투덜대는 아이와 달래는 부모 모두 지친다. 무엇보다 아이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된다. 제 일을 스스로 결정해본 적 없는 아이는 미숙한 상태를 쉬 벗어나기 어렵다. 비 윌슨의 <식습관의 인문학>에 따르면, 부모가 주는 대로 군소리 없이 먹었던 아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브로콜리를 싫어한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브로콜리를 먹은 경험이 전혀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봄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 대상으로만 취급받는 아이는 스스로 세계를 확장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공적 돌봄은 아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다. 아이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우기보다 어른의 불안을 간단히 해소하는 데 그친다. 어른의 상황에 맞춰 돌봄 시간과 형태, 내용이 결정된다. 정부, 학교, 지역사회가 구축해야 할 것은 아이들을 모아둘 공간과 관리자가 아니다. 아이들이 반길 콘텐츠와 보조자다. 아이는 돌봄 대상이지 통제 대상이 아니다. 의존적이라고 자율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오래된 리얼리티 예능 <나의 첫 심부름>이 보여주듯 네 살배기도 기회를 주면 어떻게든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한다. 아이는 스스로 할 때 가장 잘한다. 도통 아이 속을 모르겠다는 어른들에겐 영화 <우리들>을 추천한다. 주인공인 열 살 소녀들의 마음이 어른만큼 복잡다단하다. 애든 어른이든 다른 사람 마음은 원래 누구도 알 수 없다.

돌봄은 통제가 아니다

2024년 7월에도 부산에서는 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가 열렸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고 심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청소년영화제다. 저출생을 국가 비상사태라고 선포한 정부가 느닷없이 영화제 예산을 전액 삭감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성행 중이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키가 크는 아이처럼. 44개국에서 465편이 출품된 이번 19회 영화제 슬로건은 ‘달라도 좋아!’(We Are All Unique)다. 아이들이 외친다. 아이들이 자란다. 정작 우리 어른들은 이 예비시민들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가.

신성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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