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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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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식량에는 밥 자체에 동물성 재료가

군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는 ‘채식선택권 보장’
채식 이유로 군인 정체성 위축되지 않았으면
등록 2022-08-08 05:56 수정 2022-08-09 01:04
2020년부터 국방부는 군대 내 채식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관련 규정을 신설하고 대체품목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채식 장병 당사자 일부는 여전히 충분한 대체식품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군대 내 급식 모습. 한겨레 자료

2020년부터 국방부는 군대 내 채식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관련 규정을 신설하고 대체품목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채식 장병 당사자 일부는 여전히 충분한 대체식품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군대 내 급식 모습. 한겨레 자료

2019년 말 국가인권위원회에 ‘군대 내 채식선택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의 진정이 제기됐다. (국방부는 이후 관련 규정을 신설하고 대체품목을 제공해 채식선택권을 일부 보장하기로 했다.) 직업군인이면서 비건 지향인 나에게도 당시 몇 차례 언론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지만 응하지 않았다. 신분이 밝혀져 남은 의무복무 기간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군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의 태도는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국방부는 인권위 진정 이후 주기적으로 장병들의 채식·알레르기 현황을 조사한다. 나도 조사 때 두 차례 ‘채식주의자’로 보고했지만, 섣부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실질적 지원이나 관심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도시락을 챙겨야 했고 훈련 때는 말린 고구마를 씹었다.

2021년 4~9월 필자가 속한 부대에서 동물성 식품을 제외하고 받은 식단. 필자 제공

2021년 4~9월 필자가 속한 부대에서 동물성 식품을 제외하고 받은 식단. 필자 제공

‘음식을 먹는 것’을 넘어 ‘의식 행사’인 식사

임관 뒤 첫 부대 전입 때는 ‘페스코’로 채식을 시작했기에 한두 가지 반찬을 제외하고 급식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몇 달 뒤 비건 지향을 결심하면서 식당 가는 것이 꺼려졌다.

수많은 부대원 사이에서 밥과 김만 놓인 식판을 두고 괜찮은 척하며 꾸역꾸역 허기를 달래는 내 모습이 싫었다. 빈 식판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건 이런 가치관을 비아냥대는 소리와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사무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나름 우수한 체력과 책임감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훈련을 주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유독 식당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조직문화 특성상 군대에서 식사는 ‘식사(食事·음식을 먹음)’를 넘어 ‘식사(式事·의식 행사)’에 가까울 때가 많다. 특히 지휘관과의 식사나 회식 자리는 업무의 연장선인 경우가 많고, 상하 간 소통을 더 유연하게 하는 자리이다. 게다가 군 간부는 식당에 먼저 가서 음식이 잘 조리됐는지 식중독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고, 부대원의 식사 여부를 살핀 뒤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부(특히 장교)가 상관이나 부대원과의 식사를 어려워하는 것은 업무를 놓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간부이기도 했다.

간부에게는 병사와 달리 퇴근이 있다. 처음엔 ‘퇴근 뒤 숙소에서 끼니를 해결하자’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나는 임관 뒤 부대 밖 숙소가 아닌, 영내 숙소를 배정받았다. 영내 숙소는 제대로 된 (채식) 식사를 하기에 열악했다. 한 층에 20개 넘는 방과 작은 공용주방이 있는 구조였다. 공용주방에는 2구 버너와 싱크대, 전자레인지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매끼를 챙긴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레 한 끼에 최대한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간헐적 폭식이 나름의 생존전략이 됐다.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필자에게 부대 식당에서 추가로 제공한 채소와 과일. 필자 제공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는 필자에게 부대 식당에서 추가로 제공한 채소와 과일. 필자 제공

한 달 반을 급식으로 해결하는 경계 임무

며칠을 한 끼조차 챙길 수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투부대는 때때로 숙영(부대 밖 천막에서 지내는 일)과 영내 대기(퇴근 없이 부대 안에서만 지내는 생활)를 동반한 훈련이나 임무수행을 한다. 부대 초급간부 다수는 한 해에 짧게는 한 달 반에서 길게는 석 달까지 숙소 안팎에서 급식에만 의지해 지내야 한다.

내 경우 소속 부대가 군사중요시설의 경계·경비 임무를 맡은 시기에 약 한 달 반 동안 부대 내에서만 생활하며 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1~2주간 진행되는 야외 훈련 때 식사도 문제였다. 그나마 일반 급식이면 쌀밥이라도 먹었지만, 전투식량을 받으면 밥 자체에 동물성 재료가 들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간헐적으로 나오는 초코바, 과자 등의 부식(간식) 또한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다. 훈련 때마다 개인적으로 준비한 두유나 말린 고구마, 견과류 같은 부피가 작고 열량이 높은 식품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출타(외출이나 외박)가 전면 통제됐던 2020년은 어려움이 가중됐다. 요리할 식재료를 살 수가 없었다. 택배로 주문한 채소가 상하거나 얼어서 폐기한 적도 있었다.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는 각자도생의 과제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2021년 3월 비건용 식단표가 따로 공지되는 것을 알았다. 소수자를 위한 대체급식 규정이 추가된 것도 알게 됐다. ‘2021년 육군 급식운영지침’은 “채식을 요구하는 장병, 특정 종교 또는 식품 알레르기로 인한 식사 제한 장병 등에 대해서 밥과 김, 야채, 과일, (연)두부 등 가용품목 중 먹을 수 있는 대체품목을 부대 급식 여건을 고려해 매끼니 제공하며, 채식 병사에게는 우유 대신 두유를 지급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또 “급식운영 부대장은 채식, 종교, 식품 알레르기 등으로 인한 급식 제한 장병이 급식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2021년 3월 기준 2개의 군단급 부대에서 조사한 채식주의자 현황을 살펴본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해당 군단급 부대에 각각 7명, 10명의 채식주의자가 있었다. 생각보다 많았다. 군단의 병력 규모가 대략 1만~8만 명인 것과 육군 병력이 총 40만~50만 명임을 고려하면 육군 내 채식주의자 장병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채식주의자임을 밝히지 않거나, 조사에 응하지 않은 경우(나도 마찬가지였다), 말단 부대까지 조사되지 않은 정황 등을 고려하면 더 많은 채식주의자가 있을 것 같았다.

“병사만 가능하다”는 황당한 대답

그러나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21년 4월 한 교육기관에 교육생으로 입소하며 군대 내 채식급식의 현실을 마주했다. ‘채식을 요구하는 장병에게 대체식품을 제공해야 한다’는 급식운영지침을 바탕으로 식당 쪽에 채식급식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병사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장병’은 통상 장교와 부사관, 병사를 한데 이르는 말인데도 그랬다. 황당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교관의 협조와 식당 담당 간부의 배려로 매일 한두 끼 먹을 만큼의 생채소를 받을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엔 과일과 연두부도 나왔다. 밥과 생채소만으로는 끼니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지만 식당 쪽의 성의를 생각해 추가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명문화된 지침과 현실의 괴리를 식당 담당 간부와 조리병의 잉여노동으로 극복하고 싶지 않았다.

2022년 초 한 교육기관의 교관 임무를 수행하면서 훈련에 입소한 채식주의자 교육생을 만난 적이 있다. 장교 양성 과정에 있는 교육생인데, 역시 제대로 된 채식선택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해당 교육생은 건강상의 이유로 밀가루, 과일, 육류, 해산물 등을 먹지 못해 주로 쌀밥과 김치만을 먹었다. 2021년 후반기 해당 교육기관에서 교육생 2명에게 채식급식을 제공했다는 <국방일보> 기사를 봤던 터라, 식당 쪽에 이 교육생에 대한 채식급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리병 감축 등으로 채식급식이 어렵다는 답을 들어야 했다. 이후 지원 담당 부서장에게 우유 대신 두유로 주거나 조리가 필요하지 않은 채소류나 견과류, 떡 등을 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교육생이 속한 부대의 자체 예산으로 지원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답을 받았다. 결국 교관이 따로 레토르트식품이나 두유를 직접 챙겨주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군은 대외적으로 채식선택권이 보장된다고 밝히지만, 나를 포함해 적잖은 군인에게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일일이 지난날 경험한 어려움을 풀어낸 이유는 채식하는 장병들이 부대 실정과 제도적 한계로 개인의 권리를 선택적으로 보장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특히 예비 장교·부사관 교육생과 직업군인을 꿈꾸는 후배들이 채식한다는 이유로 군인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거나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

조리병의 ‘배려’와 ‘선처’에 의존해서

군의 부족한 사후 평가와 후속 조치 부재는 반쪽짜리 채식급식을 만들었다. 간략한 규정 몇 줄로는 실질적인 채식급식 권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 여전히 많은 채식 장병 당사자는 부대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충분한 대체식품을 받지 못한다. 당사자가 직접 식당의 협조를 구하고 담당 간부와 조리병의 ‘배려’와 ‘선처’를 바라야 한다.

군은 군대 내 채식급식 관련 규정을 재검토하고 실질적이고 명확한 채식급식 제공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대체급식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에 ‘장병’이 아닌 ‘간부’를 명확히 포함하도록 규정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또 채식주의자 전수조사 때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장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를 소부대까지 적극 홍보하고 부대별로 채식급식 환경을 조성하도록 적극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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