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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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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먹으면 마음이 평온해져요

‘요리학원 원장님’에서 ‘자연요리 연구가’로 전환한 문성희씨
재료의 생명력 해치지 않아 ‘건강하고 평화가 깃든’ 채식 실천
등록 2022-08-04 00:59 수정 2022-08-04 13:28
문성희씨(오른쪽 둘째)가 단촛물에 절인 오이와 구운 파프리카를 요리수업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류우종 기자

문성희씨(오른쪽 둘째)가 단촛물에 절인 오이와 구운 파프리카를 요리수업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류우종 기자

“만나시는 분이 엄청 깊은 골짜기에 사시네예.”

경북 청도군 청도역에서 택시를 타고 달린 지 30분이 다 되어가자 택시기사가 말했다. 2022년 7월18일 자연요리 연구가 문성희(72)씨를 만나기 위해 자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목적지에 다다르니 집 20여 채가 모인 동네가 나타났다. 집 뒤로는 산이 감싸주고 집 앞에는 저수지가 포근히 자리잡은 배산임수 터였다.

문씨의 집에 들어서니 앞마당의 서너 평 되는 텃밭에서 채소가 자랐고 수십 개 장독에선 된장·간장이 익어가는 중이었다. 현대적인 외관의 단층집 안에는 방에 불을 때기 위해 만든 아궁이도 있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집이었다.

발효양념만 있으면 풍부한 맛 낼 수 있어

이날 오전 문씨의 요리수업이 있었다. 20년 넘게 채식하는 그는 현재 딸 김솔씨와 함께 ‘피스풀 테이블’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며 채소만으로 최소한의 조리를 하는 요리법을 가르치고 있다. 재료 본연의 생명력이 망가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이 가장 훌륭한 요리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

청도에서 차로 50분 거리인 밀양에 사는 제자 5명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모두 1974년생으로 문씨보다 24살 아래인 띠갑장 친구들이다. 2년 전 우연한 계기로 “선생님”을 알게 된 이후 한 달에 한 번 요리수업을 들으러 온다고 했다.

기자도 함께 요리수업에 참여했다. 이날 배울 메뉴는 버섯, 가지, 오이, 파프리카, 두부를 이용한 ‘채소 초밥’이었다. 밥을 양념할 단촛물은 집간장, 식초, 비정제 원당, 소금을 넣어 끓여 만들었다. 비정제 원당은 미네랄 등 영양성분이 많다.

새송이버섯은 간장과 비정제 원당만 섞은 양념을 발라 구웠고, 표고버섯은 단촛물에 넣어 끓이고, 오이와 구운 파프리카는 단촛물에 절여 맛이 배게 했다. 가지는 소금만 살짝 쳐서 구웠다. 두부구이 양념에만 청양고추, 다진 생강이 추가로 들어갔다.

요리수업에서 만든 채소초밥과 가지국수. 류우종 기자

요리수업에서 만든 채소초밥과 가지국수. 류우종 기자

단촛물에 버무린 밥을 손에 쥐고 모양을 만들어 생고추냉이를 얹고 채소를 올렸다. 초밥을 특별하게 해준 건 문씨가 텃밭에서 기른 자소엽(약용식물)이었다. 어린 깻잎처럼 생긴 자소엽 위에 초밥을 얹으니 플레이팅도 그럴싸하게 됐다. 별다른 재료나 손질이 필요하지 않은 간단하고 쉬운 레시피였다. 각자 먹을 한 상을 만들고 넓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자소엽과 초밥을 들어 한입에 넣었다. 간장 양념의 깊은 맛과 생고추냉이의 알싸함이 입과 코를 자극했다. 자소엽을 함께 씹으니 쌈밥을 먹는 것 같기도 했다. 채소 초밥을 만들기 전엔 ‘생선을 대신하는’ 요리라고 생각했는데, 먹으면서 생선 생각은 나지 않았다. 채식은 육식을 ‘대체’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완전한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솔씨 부부는 우리가 초밥에 곁들여 먹을 ‘가지 국수’도 만들어 내줬다. 찐 가지를 식혀서 가늘게 찢어 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무쳤다. 토마토도 먹기 좋게 썰어 삶은 소면 위에 함께 얹었다. 문씨가 만든 약초맛물에 간장, 식초, 오미자발효액을 넣어 양념한 채수를 부어 완성했다. 약초맛물은 당귀, 둥굴레, 구기자, 황기, 오가피, 유근피, 칡, 감초를 우려낸 차다. 몸을 따뜻하고 맑게 해주는 재료들이다. 기자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문씨가 내준 고소한 냉차가 바로 이 약초맛물이었다. 이 물로 밥도 짓고 김치도 담근다고 했다.

문성희씨가 수업 중 자신의 요리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문성희씨가 수업 중 자신의 요리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음식은 쉽고 맛있고 재밌어야 한다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문성희씨의 요리 철학을 들었다. 그는 엄격하게 채식 식단을 유지하지만 스스로 ‘채식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의도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된 게 아니고 내 몸이 그렇게 변해서 자연스럽게 고기가 떨어져 나간 거예요. 먹고 싶은 걸 참고 안 먹는 건 아니에요.”

그는 부산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요리학원을 물려받아 20년간 운영해온 ‘원장님’이었다. 잡지에 예쁘게 나오는 화려한 음식을 만들어내면서도 늘 마음 한쪽엔 ‘이게 아닌데’ 하는 회의를 품었다고 한다. 40대 중반에 요리학원 앞에 생긴 생식 가게에서 우연히 생식을 접한 게 전환점이 됐다. 생식을 먹으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정화되는 걸 느꼈다. 그 뒤로는 고기를 먹으면 몸이 아팠고 자연스레 고기를 끊었다. 좋아하던 생선도 멀리하게 됐다.

더 중요한 건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는 2019년에 낸 에세이 <문성희의 밥과 숨>에서 이렇게 말했다.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게 사실이었다. 먹는 것이 단순해지자 사는 것이 단순해지고 가벼워졌다. 몸이 가벼워질수록 생의 찬미도 쉬워졌고 삶의 이해도 깊어졌다.”

그는 수업 내내 “음식은 쉽고, 맛있고, 재밌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그의 음식 맛을 살리는 핵심 비법은 ‘발효’다. “주로 쓰는 양념은 집에서 담근 간장, 된장, 산야초발효액, 오미자발효액이에요. 오미자발효액은 새콤달콤한 맛과 향 덕분에 드레싱 만들 때 쓰면 좋아요.” 장과 발효액만 있으면 조리를 간단히 하면서 재료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책 <문성희의 쉽게 만드는 자연식 밥상>(2013)에서 “너무 향이 강한 파, 마늘은 쓰지 않는다. 집간장, 된장, 고추장, 조청, 현미유, 현미식초, 들기름, 들깨 정도면 맛을 내는 데 아쉬움이 없다”고 했다. 또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려면 뿌리나 껍질, 씨앗을 통째로 먹으라고 했다. 무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고추씨도 털어내지 않는 식이다.

문씨의 음식 철학은 오랜 시간 몸으로 부딪치고 실험하며 완성한 것이다. 그는 채식을 시작하면서 거친 밥과 생식을 먹었고 어린 딸을 데리고 부산의 철마산에 들어가 오두막에서 8년간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산에서 내려와 그간의 경험으로 정립한 밥상의 원칙을 책 <평화가 깃든 밥상>(2009)으로 풀어냈다. ‘모든 생명체는 존중받아 마땅하며 생명의 조화를 어지럽히지 않기 위해 죽은 동물의 고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되도록 가공식품이나 수입식품을 먹지 않는다. 조리법을 간단하게 하는 대신 한 가지 요리에 다양한 채소를 골고루 사용하며 반찬 가짓수를 두세 개 이상 놓지 않는다. 위장이 가득 차도록 먹지 않는다….’

문성희씨 자택 앞마당에 놓인 장독대. 류우종 기자

문성희씨 자택 앞마당에 놓인 장독대. 류우종 기자

“대체육은 채식 아니다”… 생명이 없는 채식

그의 철학은 먹는 것을 넘어 생활 방식 전반으로 확대된다. 그는 재봉틀 없이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간단한 홈질로 천을 기워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완성한다. “내 옷을 내가 만들어 입고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세상에 무서워지는 게 없어요.”

문씨의 삶은 ‘구도자의 길’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기 삶의 방식을 다른 이에게 억지로 권유하지 않는다. 수업을 들은 제자 이미라씨는 “사실 우리 가족은 고기를 많이 먹어서 채식주의자로 살기 힘든데 선생님은 요리 가르칠 때 ‘소고기 넣어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책감 느끼지 않도록 해주신다”며 “우리는 단순히 요리만 배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식을 넘어 선생님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배우고 스스로 조금씩 바꿔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런 문씨도 최근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쓴다며 이른바 ‘작심발언’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 환경단체가 후원금 모금 행사를 호텔에서 열고 뷔페를 성대하게 차려 음식 낭비하는 걸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쓴 글이라고 한다.

“환경과 생태를 걱정하면서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먹을거리에 방심 상태인 것을 볼 때 그 사고의 진정성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자기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에 대한 사유가 적거나 실천이 떨어지는 태도를 보면서 다시 한번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는 슬로건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말로 하거나 운동을 할 때가 아니고 각자 삶의 방식을 잘 정하고 잘 살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문씨가 지켜온 채식 자연식은 외로운 길이었다. 그는 20여 년 전 요리학원을 그만두면서 사치스럽고 자극적인 음식과 절연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눈과 귀를 사로잡는 화려한 요리방송, 유튜브 ‘먹방’에 열광했다. 그렇다면 최근 트렌드로 자리잡은 채식과 비건 등에는 어떤 생각일까 궁금했다. 그는 이 유행에도 단호했다.

“채식하는 사람은 특히 영양 균형에 신경 써야 해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해요. 밖에서 샐러드 사먹는다고 채식이 아니에요. 그리고 대체육은 채식이라고 보지 않아요.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해요. 첨가물 들어가지, 색소 들어가지 대체육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탄소를 쓰겠어요. 그러려면 차라리 좋은 고기를 먹으라고 해요. 채식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생명이 하나도 없는 채식이 많아요.”

문씨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의 본질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 채식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건 ‘건강하게 먹는 것’이다. 내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건강해지고 다른 생명이 건강해지고 환경과 지구가 건강해져서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다.

내가 건강해야 지구가 건강해진다

모두가 문씨처럼 실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내가 사는 방식이 훌륭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채식에 관심 있지만 도시에서 바쁘게 살면서 실천하기 쉽지 않은데 어떡하죠?”라고 문씨에게 물었다. 문씨는 우선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기보다는 내가 의식을 제대로 가지려고 노력해야 해요. 내가 뭘 원하는지까지는 모르더라도 멈춰 서서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어딘지, 이게 맞는지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요리수업을 곁들인 인생 강의가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자 참석자들은 각자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식탁을 치웠다. 음식쓰레기는 없었고 그릇은 세제를 쓸 필요 없이 물로 씻어내기만 하면 됐다. 모든 것이 개운했다.

청도(경북)=글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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