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재확산세가 아주 가파르다. 전문가들이 이미 경고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퍼지며 많은 사람에게 끝난 것과 같은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자영업자들은 정부의 지원과 보상이 미진한 상태에서 영업제한의 손실을 감당하며 파산을 향해 달려가던 악몽이 떠오른다. 교육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인격적 만남 없이 지식을 정보로만 전달하며 학력이 양극화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던 악몽이 떠오른다.
또 악몽이 떠오르는 이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거나 돌보는 사람들이다. 요양원에 부모님을 의탁한 자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대면접촉을 제한받았다. 부모님이 집에 계신 분들도 혹여나 부모님이 자신들로 인해 감염될까봐 방문을 극도로 자제했다. 요양원이 아니더라도 노인은 거의 집에 갇히다시피 했고 사회적 삶이 단절됐다. 자식은 부모님을 보며 “이것이 사는 건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했다.
코로나19로 부모님을 여읜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인간의 마지막인 장례는 아예 생략되거나 최소화됐다. 임종을 지키는 건 고사하고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주검을 ‘처리’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는 게 고작인 경우도 많았다. 이 광경을 보며 죽음을 앞둔 부모들은 필사적으로 요양원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려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렇게 부모님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코로나19는 노인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통해 갑작스럽게 인간다운 삶/죽음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했다. 그것은 돌봄이 있는 삶, 돌봄이 있는 죽음이다. 죽음의 과정이 전적으로 가족과 친족에게 맡겨진 한국의 경우, 그렇게 죽음과 장례를 돌볼 친밀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가족 대신 장례’인 ‘공영 죽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없더라도 누구든 장례는 애도받는 존엄한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도야말로 인간 존재에 ‘돌봄’이 필요하며 그래야 인간의 마지막이 존엄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단적으로 말해 공영장례에 홈리스행동 같은 시민단체들이 주목하며 공론화를 시도하는 것(2022년 8월12일 홈리스추모제 준비팀은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 가족 대신 장례’라는 제목으로 시민단체 워크숍을 연다)은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처리’의 과정이 아니라 ‘애도’의 과정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이는 돌봄 없이 인간의 삶/죽음은 ‘인간다운’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인간성의 본질이 돌봄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로 확장하면 돌봄이 새로운 사회의 근본적 구성원리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돌봄이 사적 친밀성에 근거해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어야 한다. 더구나 한국에서 돌봄은 공공적 지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 같은 사적 친밀성이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독박’을 쓰는 일이 허다했다. 돌봄에 대해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바로 독박이었다.
돌봄이 독박이 되는 순간 돌봄을 받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돌보는 사람을 ‘숭고한 존재’로 만들며 상찬하지만 그 상찬은 사실상 그 사람을 사회적 고립 상태로 고정해버린다. 지원과 협력으로 그를 돌봄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더 희생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실제 부모를 전적으로 돌보는 지인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효녀’라고 말하는 게 무엇보다 몸서리쳐지고 공포스럽다고 했다. 자기는 효녀가 아닐뿐더러 그 말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헌신하라고 목을 죄는 것으로 들린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건 효녀라는 상찬이 아니라, 하루라도 돌보는 부모로부터 자유롭게 자기 시간을 오롯이 가지는 거라고 말했다.
‘어쩌다 생긴 책임감’, 어쩌다 혹은 책임감그의 이야기는 돌봄이 독박이 아니라 공공적이 돼야 한다는 것이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국가나 지역사회가 직접 돌봄을 서비스로 제공해야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돌봄이 공공적이 된다는 건 그것이 자녀이건, 지역의 공적 업무를 맡은 사람(한 지역에서는 토박이 교사로 시골에 사는 ‘청년’이 그 마을 노인 전체를 돌본다. 그가 ‘어쩌다’ ‘청년회장’이 되어 연로한 마을 어른들을 틈틈이 방문하다보니 ‘어쩌다’ 전적으로 그게 자기 일이 됐다고 한다)이건, 요양보호사이건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보는 사람을 돌보지 않으면 그 삶은 고립되고 독박이 된다. 자식이건 청년회장이건 누구건 말이다. 이것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공적으로 돌보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코로나19는 취약한 사람들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국가의 ‘공공 노동자’인 돌봄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인 돌봄 자체로 얼마나 위험에 노출됐는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의료인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인 아동복지센터 교사와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 지원을 하는 이는 감염 위험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보호조치는 매우 미흡했다. 백신을 누구보다 먼저 의무적으로 맞게 한 것 말고는 없었다. 그것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들이 돌보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말이다. 이는 국가가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가족뿐만 아니라 공공 노동자 역시 외부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을 ‘신성화’해서 버티게 한다.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인 류은숙과 함께 ‘정의로운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주창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활동가 김영옥은 돌봄 노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돈만 보고서는 못하는 일이 돌봄 노동이며(그만큼 한국에서 돌봄 노동은 전형적인 고강도 저임금 노동이다), 둘째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지만 마음을 다치기 가장 쉬운 노동이며(그래서 출근할 때 그 마음을 집에 두고 간다), 셋째는 어쩌다 생긴 책임감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어쩌다 생긴 책임감’에서 ‘어쩌다’보다 ‘책임감’에 무게가 옮겨질수록 돌봄 노동자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숭고화/신성화’한다. 이것은 돌봄 노동자가 스스로 자아도취돼 일어나는 일이 절대 아니다. 돌봄이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을 희생하며 고립돼 수행해야 하는 일이 될 때 그 일의 ‘지속’을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에선 앞에서 말한 것처럼 ‘효녀’라는 말에 몸서리치지만, 다른 한편에선 정반대로 자기도 모르게 제 일을 ‘신성화/숭고화’한다.
이런 점에서 돌봄이 사회의 근본적 구성원리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 돌봄을 낭만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구성원리로서 돌봄을 제안하는 것은 돌봄이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직시해야 한다는 냉정한 시각이다.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둘의 관계만이 절대적인 것이 되면 돌봄은 ‘공의존’이라는 파국적인 관계로 끔찍하게 변형돼버린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책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공의존을 경고한다. 공의존은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이 돌봄을 받는 사람이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 자체에 의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자기에게 의존하는 사람이 없는 걸 못 견디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돌보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을 심화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기든스는 알코올중독자가 오랜 치료를 거쳐 회복되더라도 그의 가족관계가 이런 공의존적 관계이면 그가 다시 알코올의존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공의존의 대표 사례라고 말한다. 이런 관계가 되면 돌봄은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모두를 헤어날 수 없는 무간지옥에 빠뜨린다. 고립된 관계를 더욱 고립시켜 결국 파국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친밀성에 기반한 가족뿐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심심찮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열정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소명의식에 기반한 ‘종교적’ 열정이면 더욱 그렇다. 사실 사람을 돌보는 일은 쉽게 종교화될 수 있다. 돌봄 자체가 생명을 돌본다는 의미에서 종교적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사목’은 ‘양떼를 돌보다’라는 뜻이다. 서구 중세에서 돌봄은 전적으로 교회가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돌봄이 사회적 구성원리가 돼야 한다는 말은 돌봄의 ‘세속화 만세’를 주창하는 것이다. 돌봄을 신성화해 범인은 절대 수행하지 못하는 ‘거룩한 이’의 고립된 활동이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어쩌다 책임감’에서 무게중심이 ‘책임감’이 아니라 ‘어쩌다’ 쪽에 조금 더 있어야 한다. ‘어쩌다’ 생긴 책임감이기 때문에 자신이 위험해질 때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하며, 그가 그만둘 때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이어 수행할 수 있도록 그 돌봄이 돌봐져야 한다. 반대로 ‘책임감’에 무게추가 더 쏠리면 돌봄은 그 종교적 속성으로 급격하게 독박과 공의존으로 치달을 수 있다.
돌봄의 세속화, ‘어쩌다 아무나 돌보자’‘지나친 책임감’에서 돌봄을 구해 다시 ‘어쩌다 책임감’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게 세속화된 돌봄의 자리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의 역할이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친밀성 관계에서 돌봄 독박을 쓰고 효녀문을 세우는 것도, 고강도 저임금 노동을 자기희생적인 숭고한 활동으로 ‘종교화’하는 것도 아니라 말이다. 이것이 돌봄이 사회의 근본적 구성요소가 되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를 돌봄에서 구원하는 일이다. 어쩌다/아무나 돌보기 위해 우리는 돌봄에서 해방돼야 한다. 돌봄에서 해방돼야 우리는 아무나/어쩌다 돌볼 수 있다. 그것이 아마 돌봄사회가 아닐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같이 고민해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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