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4일 아침 8시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7-1 승강장.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에 대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답변해달라고 촉구하는 삭발 시위 4일째. 백발의 꽁지머리를 한 박경석(62)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옆에 사다리를 한 칸씩 머리에 쓰고 상반신에는 쇠사슬을 두른 활동가 세 명이 나란히 섰다. 모두 휠체어를 탄 채였다. 그들 앞 승강장 바닥에는 사진 11장이 깔렸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는 글씨를 서울역 벽과 바닥에 적은 2001년 사진부터 세종시에서 장애인은 탈 수 없는 일반버스를 막아선 2021년 사진까지.
“왜 지하철에서만 이야기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요. 우리는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가서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 사람을 만나는 이 최초의 권리조차도 보장되지 않아 비롯되는 교육, 노동, 시설 문제까지…. 이 모든 문제를 같이 이야기해왔습니다. 그 부분을 좀 알려주십시오.”
박경석 대표가 취재진을 향해 말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시민들이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박 대표는 외치고 주장하고 요구하기보다 바로잡고 정정하고 설명하느라 벅차 보였다. 장애인 콜택시 같은 특별교통수단을 운영하거나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등 권리예산을 확보해달라고 요구하는 싸움은 2021년 3월16일부터 벌써 1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지하철 출근길 시위는 2021년 12월3일 시작됐다. 예산 없이는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나 국토교통부에서 장애인 관련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예산을 쥔 기획재정부 앞에서 번번이 좌절됐다.
그런데 갑자기 새삼스럽게 세상이 이들을 주목했다. 2022년 3월24일 장애인 권리예산에 관한 인수위의 무성의한 답변을 보고 나서 전장연이 한 달여 중단했던 출근길 시위를 재개하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다음날인 25일부터 페이스북에 연달아 글을 올렸다. 이 대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 장애인 이동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세훈 시장이 들어선 뒤에 지속적으로 시위한다 △국민의힘은 전장연의 요구를 대선 공약에 반영하고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고 주장했다. 전장연은 사실과 다르거나 총론보다 각론에 집중하는 그 주장을 “뒤따라가며” 정정하고 바로잡기에 바쁘다.
“가짜뉴스가 많더라고요. 4월1일 만우절 기념이라면 웃으면서 넘기겠는데요. (중략) 그로 인해 혐오발언이 너무 많습니다. 장애인 거주시설에 필요한 예산 6224억원을 가지고 ‘6224억원어치 맞아야겠다’ 이렇게요. 이 대표의 발언 이후 쏟아지는 댓글, 전화 때문에 저희는 어마어마한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제발 이런 것을 조장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지금 링 위에 올라 있다. 그 맞은편에는 집권 여당이 될 국민의힘 대표가 서 있다. 링 밖에서는 비난과 야유, 응원과 연대가 쏟아진다. 그는 4월13일 JTBC 프로그램 <썰전 라이브>에서 이준석 대표와 생방송으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소수자 운동의 대표와 정당 대표 간의 일대일 토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다. 전장연이 이처럼 주목받은 것 또한 처음이다. 4월4일 오후 혜화역 인근 전장연 사무실에서 박경석 대표를 만났다. 7일 전화 인터뷰도 더했다.
“어떤 대통령, 어떤 서울시장도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없어요. 저희는 그럼에도 왜 안 되는지 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앞뒤 맥락이나 배경은 다 생략해버리고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잖아요. 더군다나 (이준석 대표는) 스피커가 크죠. 우리는 과거부터 다시 설명해줘야 하는데 우리가 설명하려고 하면 다들 도망가버리거든요. 결국 우리는 ‘어’ 하는데 이 대표가 ‘아’ 하면 ‘아’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어처구니없고 문재인만 편든다고 낙인찍는 거예요.”
전장연을 저격하던 이준석 대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나아가 장애인과 장애인까지 갈라칠 기세다. 이 대표는 4월1일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반대하는 장애인 단체를 만나 “지역사회에서 복지서비스가 강화되기 이전에 선택이 아닌 강요로 시행되는 탈시설 정책은 인권 유린에 가깝다”고 말했다.
2006년 제정된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제19조 ‘자립생활과 지역사회 통합’에서 ‘모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선택권을 가지고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지님을 인정’하며 ‘특정한 거주 형태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고 규정해 탈시설을 명문화했다. 서울시는 2009년 전국 최초로 자립생활가정(현 자립생활주택)을 시작했고 2021년 8월 정부도 ‘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우리랑 싸울 게 아니라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이랑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박 대표는 되물었다.
-이준석 대표가 장애인 이동권 의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요.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중요한 거예요. 이동권이 알려지면 뭐 합니까. 치러야 할 이 어마어마한 후폭풍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혐오와 차별이 공고화할까봐 저는 그게 더 무서워요. 분명 세력화할 거예요.”
-지하철 출근길 시위에 대해 이 대표의 발언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과반(55.9%)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1 반면 4일 지하철 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며 취재할 때 욕설을 적어도 세 번 들었는데요.
“이 대표가 짜증과 불편에 확고한 지침을 준 거죠. 혐오발언 했냐 아니냐 말장난하는 게 아니라 그의 발언을 통해 혐오적인 말들이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강화되는 게 혐오정치잖아요. 갈라치기 정치를 통해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모으려는 전략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전장연은 거기에 바쳐지는 제물이겠죠. 제사상 위의 사과는 안 될 것 같고 저기 끄트머리의 떡볶이 정도 될까요?(웃음) 이제는 (탈시설 당사자에게 주어지는) 자립정착금을 횡령한 사람으로 모는 사람들도 보이고요.”
시민들 사이 갈등은 정치가 풀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정치가 기능하면서 ‘다른 시위 방법은 없냐’ ‘왜 시민을 볼모로 삼냐’는 힐난이 확대 재생산돼 박경석 대표에게 그대로 꽂힌다. 왜 지하철 시위 같은 방식을 쓸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 그렇게 “소수자의 마지막 저항 수단조차 칸막이 쳐버렸다”고 그는 말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지하철에 리프트가 처음 도입됐다. 김포역, 잠실역, 종로3가역 세 곳. 지하철 타는 건 엄두도 못 내던 장애인들이 리프트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리프트를 타다보니 고장 나고, 떨어지고, 다치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 2001년 설날 아들을 만나러 이동하던 장애인 노부부가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철도청은 사과는커녕 마땅한 재발 방지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2001년 2월6일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선로를 점거했다. ‘중증장애인이 장애운동 역사의 전면에 선 날’이라고 평가받는 그날이다.2
“몇 날 며칠을 서울역 1호선 앞에서 물끄러미 지하철 들어오는 것을 바라봤어요. 무서우니까요. 두려우니까요. 또 실질적으로 점거가 가능할까도 싶었죠. 가만히 지하철 들어오는 걸 보니 어느 지점에서 서는데 계속 보니 그 지점을 넘지는 않더라고요. 그 앞에서 (선로를) 점거하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제가 내려가니 휠체어 타고 목발 짚은 친구들까지 내려왔어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 문제의 심각성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다고 느꼈는데 뭔가가 폭발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학교조차 갈 수 없다는 것, 사회 전체를 새로 배우게 하지 않고서는 야학에서의 작은 배움도 불가능하다는 것.’3
‘이동권’ 투쟁이 사회를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이동시켰다. 오이도 참사 해결, 저상버스 도입,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특별교통수단 도입 등으로 장애인 단체들의 요구 사항이 확대됐다.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일 때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아저씨 이름이 이동권이에요?’ 묻던 시절을 지나 2003년 이동권은 국어사전에 신조어로 등록됐다. 그리고 2005년 이동권을 법률로 보장한 교통약자법이 만들어졌다. 장애 당사자가 싸움의 주체가 돼 이동권을 시혜와 동정이 아닌 권리의 하나로 인정받아낸 역사다.
“성경에 ‘귀 있는 자 들으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안 듣더라고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거죠.” 말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기보다 ‘나쁜 장애인’이 되기로 했다. 그렇게 사회를 또 한 발짝씩 이동시켰다.
2005년 12월 경남 함안에서 혼자 살던 중증장애인이 수도관이 터져 얼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활동보조인 제도화 투쟁이 시작됐다. 2005년 6개월 동안 15억원 배정됐던 활동보조 시범사업 예산이 2006년 1년에 15억원으로 반토막 났다. 국회가 회기가 끝나 문을 닫은 상태에서 서울시도 외면했다. 서울시가 몇천억원을 쏟아붓겠다는 노들섬 오페라하우스를 향해 중증장애인들은 10시간을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넜다. 2009년 6월 장애인 거주시설을 운영하는 석암재단 비리 투쟁 끝에 시설 거주 장애인 8명이 짐을 싸들고 나와 ‘탈시설 정책’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 농성을 벌였다. 모두 박경석 대표가 꼽는 장애인권 운동사의 결정적 장면들이다.
-왜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점거’할 수밖에 없었나요.
“다른 방법도 당연히 있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게 아니에요. 이미 수많은 그 다른 방법을 했다는 게 중요하죠. 합법적으로 하라고 해서 공문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대한민국에서 공무원들이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는데요. 다름이 뭔지 아십니까? 사투리만 달라요. 같음은 뭔지 아세요? ‘검토하겠습니다’는 말이에요. 절대 안 된다는 말은 안 해요. 언제까지 검토할 거냐고 물으면 ‘언제까지 검토할지도 검토하겠다’고 해요. 그리고 먼저 맡으려 하지 않고 탁구공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미루는 거죠. 그렇게 다섯 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지낸 21년은 배신의 세월인 거죠.”
-삭발, 단식, 노숙, 그야말로 투신, 온몸을 던지는 싸움이네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무기인 것 같아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을 쓸 것이고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할 텐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뭘 할 수 있을까요. 차별에 저항하는 의미로 몸과 자기의 마음을 함께하고 일치시키는 거죠. 언행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그 21년의 세월, 차별과 혐오와 배제를 뚫고 온 흔적은 그의 몸에 새겨져 있다. 그는 원래 ‘마도로스’를 꿈꾸던 호탕한 청년이었다. 해병대를 제대한 1983년 경북 경주 토함산에서 열린 전국대학생 행글라이딩 대회에 참가했다가 추락해 하반신 마비가 됐다. 5년을 집 안에서만 살았다. 날카로운 흉기로 하반신을 계속 찔렀다. 정신적으로 또 물리적으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의 시간. 자살 여행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어머니 권유를 따라 교회에 가면서 한 달에 많아야 다섯 번 집을 나섰다. “스스로도 갇힌 세월인 줄 알았어요.” 장애인 10명 중 7명이 한 달에 다섯 번도 외출하지 못한다고 답한 2001년 보건복지부 통계조사를 포개어보면서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몸을 던지고 부숴 사회를 ‘감각’하게 만드는 동력은 역설적이게도 ‘무감각’의 시간으로부터 온 셈이다.4
1988년, 겨우 집 밖으로 나왔다. 1994년 노들야학 교사를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 지역 한 복지관의 총무과장으로 일할 때 야학보다 복지관에 더 집중해달라는 요구를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야학을 선택했다.5 “약간의 실천 영역이 생길 때 운동이라는 게 내 삶 속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는 “삶의 도화지”인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장샘’으로, 또 현장을 누비는 전장연의 활동가로 무모한 농성을 먼저 제안하고 또 끝까지 책임져온, ‘항상 있는 사람’이 되었다. 또 무섭게도 그 모든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바꾸려면 물리력이 필요하잖아요. 그 희망의 물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국회에 있을까요? 저는 현장에 있다고 봐요.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관계를 맺으며 그 권한과 권리를 쟁취하고 확장시키잖아요. 저는 거기에 희망의 물리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대표는 2001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시작할 때 “욕 한 트럭을 먹어도 상관없으니 장애인 인권 문제가 <100분 토론>에 나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 소원이 성취되길 바란 건 아니었다. 이준석 대표는 “사상 처음으로 정당 대표가 당의 장애인 정책을 바탕으로 방송 토론에 나서는 상황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일대일, 제한시간까지 토론회 외관은 일견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동료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박경석 대표를 잘 아는 이들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표가 상대를 잘못 골랐다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정치공동체가 장애인 인권 문제를 그들이 아닌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토론이 아니라 갈라치기 정치 속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설명해야 하는 토론이 돼버렸잖아요.”(김도현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비장애 중심주의, 또 경쟁주의, 능력주의와 싸워온 사람들인데 이준석 대표는 그 가치의 화신 같은 사람이잖아요. 그걸 말로 싸우는 게 또 얼마나 비장애 중심적인가요.”(홍은전 인권·동물권 기록활동가)
박경석 대표는 오히려 “우리가 잃을 게 뭐가 있겠냐”며 주변을 다독였다고 한다. 그에게 이는 “권리와 권력의 충돌”이다. “이 사회가, 그 차별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함께 알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수자에게 향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고통스럽게 잊혀가는가” 알면 좋겠다. 그다음은 정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가 협박해서 그만두는 방식이 아니잖아요.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고 안 타고는 국가 책임의 문제예요. 거기에 대한 답은 인수위에 있고 답이 안 나오면 또 지하철을 타게 될 텐데 그때 또 벌떼처럼 달려들겠죠. 그 순간에 계속할 건가 말 건가가 하나의 요소가 되겠죠? 도망가고 싶겠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출근길에 지하철을 탑니다! 이렇게 하는 게 문제가 안 되는 사회여야 하잖아요. 우리가 타니까 문제가 되잖아요. 우리가 타는데 왜 문제가 돼야 합니까? 자연스러울 때까지 계속 지하철을 타야죠.”
-토론을 앞둔 마음이나 전략이랄 게 있나요.
“저희야 뭐 시민들에게 설명할 기회만 있다면 좋죠. 그들과 권력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왜 이렇게 하는가, 어떤 배경이 있는가 설명하는 토론으로 만들면 되죠. 제가 이준석 대표를 이겨서 뭐 하겠습니까.”
-차기 집권 여당의 대표이고 많은 지지 세력을 거느리고 있잖아요. 토론으로 당장의 혐오와 차별이 더 심해질지도 모르는데요.
“뭐, 죽겠죠.(웃음)”
-(당황) 힘들어 죽겠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이러다 죽겠다는 말인가요.
“둘 다요. 그런데 죽을지언정 잊히지는 않을 거예요.”
-잊히지 않는 게 왜 중요한가요.
“자기의 가족, 친구,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요. 인간으로서 기억되지 않죠. 누구나 태어나면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원하지 않을까요. 그 이름이 불리기 위해서 현대사회에 바로 시민의 권리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치장품이 아니고 정치적 쇼도 아니잖아요. 혐오발언에 맞아서 죽겠죠. 죽을게요.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질문은 하고 죽어야죠. 두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글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참고 자료
1.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가 뉴스토마토 의뢰로 4월5~6일 성인남녀 10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2. <차별에 저항하라> 김도현, 박종철출판사, 2007년
3. <묵묵> 고병권, 돌베개, 2018년
4. ‘싸우는 인간의 탄생 박경석’, 홍은전, 비마이너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2021년
5.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박경석, 책으로여는세상,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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