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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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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의 장애인

등록 2022-03-03 01:21 수정 2022-03-03 09:5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누구보다 건강했던 친구는 자가면역질환으로 근육이 손실되고 나서는 지하철 계단도 버거워했다.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탈 때면 저상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사실 친구만큼이나 나도 저상버스를 좋아한다. 피곤한 날이나 거리에 눈이 많이 쌓인 날에 특히나 저상버스가 반갑다.

처음부터 직접행동을 기획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저상버스의 도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저상버스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장애인들의 직접행동이었다. 장애인들은 출퇴근길에 휠체어를 타고 버스 탑승을 시도하거나 버스를 막아 세우고 구호를 외쳤다. “이동권은 생존권이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싶다.”

20년 전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최근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했다. 장애인·영유아·임산부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규정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그 과정에서 예산 반영이 의무가 아니라 임의조항으로 바뀐데다 기획재정부가 ‘예산 확대가 어렵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예산이 편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법 조항도 비싼 휴지 조각이 될 뿐이다.

21일 동안 이어진 전장연 시위에 대한 반응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출근길이 다급한 많은 시민이 발을 동동 굴렀고, 더러 시위하는 활동가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시위의 내용이나 주장보다는 시위 방식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다. “어떤 주장도 정당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 법을 어기면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과연 장애인들의 직접행동은 부당한 방식일까?

사회학자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을 “지배 엘리트 계층에 대해 자기 이익을 반영하지 못하고 별다른 지렛대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법관이나 국회의원, 혹은 기업가라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직접 관철할 힘이 있으니까 직접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반면 마음대로 이동할 권리조차 없는 장애인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직접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1950년대 인종차별을 종식하기 위해 불법시위를 감행한 미국의 흑인들처럼 말이다.

물론 주장의 내용만큼이나 주장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활동가들이 직접행동을 준비할 때 메시지 내용과 더불어 주장을 관철할 방식을 고민하는 이유다. 많은 활동가가 처음부터 직접행동을 기획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먼저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법과 제도에 호소해도 바뀌지 않을 때 활동가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직접행동을 선택한다.

좋은 직접행동이 일깨우는 것

전장연 역시 정부가 장애인 이동권 관련 공약을 지키는지 모니터링하고,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통과되는 과정에도 적극 개입했다. 하지만 결국 이동권을 위한 예산이 확보되지 않자 마지막 수단으로 직접행동에 나섰다. 직접행동을 할 때도 활동가들은 권력자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동시에 시민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 전장연은 장애인 이동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지하철 시위를 택하면서도 날마다 누리집에 출근길 지하철 시위 경로를 올려 정말 시간이 급한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TV 토론에서 이 이슈를 언급해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자 3월2일까지 시위를 잠정적으로 중단하며 대선 후보들의 정치적 책임을 촉구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처럼 “직접행동은 어떤 이슈를 극적으로 표출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무시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전장연의 시위로 교통약자를 위한 예산이 늘어난다면 그 열매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된다. 저상버스 도입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전장연의 직접행동을 지지하는 건 공적인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좋은 직접행동은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일깨워준다. 정치인과 법률가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이 사회의 주인일 수 있다.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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