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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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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옆의 여자들

등록 2021-08-25 09:25 수정 2021-08-26 02:03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이제 와 솔직히 말하면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 편을 엄청나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2020 도쿄올림픽이 막을 내리는 시점에 김연경·박세리·지소연·남현희·김온아·정유인 여성 스포츠 스타 여섯 명을 조명하다니, 대단히 시의적절한 동시에 그래서 약간 뻔한 기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의 노력과 성취에 대한 인간 승리 드라마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공영방송적’ 다큐 아닐까 넘겨짚는 한편, 그래도 충분히 보고 싶은 인물들이기에 방송 시간에 맞춰 채널을 고정했다. 5분 뒤, 섣부른 예견을 깊이 반성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만들어 여성의 입으로

‘국가대표’ 편은 ‘뛴다’와 ‘목소리를 낸다’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김연경이라는, 전무후무한 실력과 스타성을 지닌 인물로 시작해 시청자를 사로잡은 다음 주인공들이 속한 업계와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메시지를 던진다. 연봉과 월급 차별, 같은 종목 남성보다 훨씬 떨어지는 처우, 성차별적 중계 멘트, 여성 운동선수를 성적 대상화 하는 시선, 여성이 지도자로 성장하기 어려운 현실 등 스포츠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50분간 종횡무진 누비는 구성은 결기 있으면서도 감각적이다. 출연자들의 인터뷰 사이를 이으며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짚어주는 프리젠터는 박주미 KBS 스포츠 기자다.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만들어 여성의 입으로 전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국가대표’ 편을 연출한 이은규 피디는 2020년 6월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개그우먼>에서 송은이, 김숙 등 여섯 명의 개그우먼을 조명하며 김상미 피디를 프리젠터로 기용했다. 권위 있는 전문가의 자리마다 남성을 우선 섭외하는 방송가의 관성을 벗어나 출연자들과 함께 그 세계 안에서 성장해온 여성 동료에게 마이크를 건넨 것이다. 2021년 4월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윤여정>의 구성 또한 흥미롭다.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의 소감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65년차 배우 김영옥, 60년차 배우 강부자, 노희경 작가, 한예리, 김고은 등 그의 앞·뒤·옆에 있었던 여성 동료들이 건네는 온전한 찬사다. 이 작품 역시 윤여정 개인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가 55년 동안 여성 연기자로 살며 부딪혀온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인물에서 출발한 시선이 시대를 향하며 메시지가 된다. 이은규 피디가 김선하 작가, 이은비 카메라감독을 비롯한 여성 제작진과 함께 이룬 성과이자, 기꺼이 혹은 조심스레 목소리를 더한 출연자들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다.

‘오래오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이은규 피디는 2018년 성매매 실태를 파헤친 <추적 60분> 방영 뒤 진행한 인터뷰에서 “‘공영방송에서 그런 페미니즘 이슈를 다뤄도 되냐’는 등 시청자 게시판도 와글와글하지만, 이젠 지나갈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페미니즘 이슈가 눈에 많이 보이고 내가 하지 않더라도 내부에서 많은 아이템이 나오는 걸 봐서는 앞으로도 이런 이슈를 많이 다룰 것 같다”(<오마이스타>)고 말한 적이 있다. 도대체 ‘그런’ 페미니즘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국가대표’ 방영 직후 KBS 시청자 게시판 수십 페이지는 호평으로 가득 찼다(뒤늦게 유튜브 영상이나 출연자의 SNS에 악성 댓글을 다는 이들은 이 작품의 존재 의의를 다시 한번 증명한다). 이은규 피디의 목표는 “그냥 되게 오래오래 다큐를 정년퇴직할 때까지”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공영방송에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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