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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층 주택은 아파트로 가는 모라토리엄의 공간?

서울의 저층 주택, 관리보다는 끊임없이 부수고 짓기를 반복하는 도시의 유예 공간
등록 2021-08-24 23:35 수정 2021-08-25 10:55
1988년 11월 서울 사당동 철거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강체 철거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88년 11월 서울 사당동 철거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강체 철거에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서울 용산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산등성이에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개발해야겠네, 잘되면 대박이겠다, 평당 1억 넘겠는데, 사놓을걸’을 속으로나마 읊조리는 게 어색한 일은 아니다.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다. 다들 그렇다.
재개발될 그 땅, 한남3구역에 선엽씨가 산다. 50여 년을 세입자로 살았다. 고양이 까망이 3대를 돌봤고 이웃이랑 저녁을 먹었다. 비 새는 집은 그냥 견딘다. 그 땅에 형주씨는 투자했다. 정부가 빚내라고 해서 빚내어 8평 건물만 샀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개발 진행에 울분을 토한다. 그 땅에 종성씨가 물려받은 집이 있다. 그 집은 약속된 희망이다. 집을 떠나 전세자금 마련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그 희망 하나로 버틴다. 이 모든 처지는 그것대로 평범하고, 그것대로 지난하여 누구 하나 악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 다만 종성의 희망이 실현되는 날 선엽은 쫓겨난다. 선엽이 버티면 형주는 다시 분노할 것이다.
서울 재개발·재건축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따라 다시 뜨겁다. 철거를 동반할 것이다. 철거 앞에 예전 같은 통곡은 잘 들리지 않는다. 새로 들어설 아파트가 수십억원일 게 당연한 마당에 전세 3500만원짜리 집 잃은 고통을 호소하는 일은 생뚱맞다. 분노는 퍼지지 않는다. 투자해 부를 불리는 건 모두의 평범한 바람이라는데, 그 모두를 향해 분노를 쏟아낼 수도 없다. 무엇보다 통곡과 분노는 이 뜨거운 부동산 시장에서 ‘저 집을 가질 수 있느냐’를 둘러싸고 할 이야기이지, ‘저 집에 마음 편히 살 수 있느냐’를 두고 할 말은 아닌 게 됐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다들 그러하여, 거기 들지 못하는 누군가 슬픔마저 빼앗겼다.
이어질 글은 그런 도시, 서울의 2021년 평범한 날들과 그 이후를 담았다._편집자주

서울의 풍경을 높게 솟은 아파트로만 기억한다면 반쪽에 그친다. 그럴 리 있겠는가. 인구 960만의 거대한 도시에는 아파트에 맞춘 삶의 양식(부담 가능한 소득, 대개 2인 이상 가족)과 거리가 먼 사람도 많다. 어쩌면 당신도 그런 사람, 거대한 아파트 단지 사이 5층 미만 저층 주거지에 살 것이다. 이런 곳이 124.5㎢, 전체 서울 주거지역의 38.2% 정도 된다. 판잣집을 허물고 정책 지원에 힘입어 1980년대 다세대, 1990년대 다가구 주택을 지었다. 지금 저층 주거지 대부분은 단독주택과 이런 건물들이 채운다.1

2021년 서울에서 저층 주거지를 부르는 맥락은 모두 알다시피 재개발 대상지다. “저층 주거지 등 비정비 구역까지 적용 가능한 모델을 신설하여 새로운 주택공급을 원하는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겠습니다.”(국토교통부, ‘대도시권 주택공급 획기적 확대 방안’) “주거정비지수제가 폐지되면 노후 저층 주거지 가운데 재개발 가능 지역이 14%에서 50%로 늘어나게 됩니다.”(오세훈 서울시장, ‘재개발 규제 완화 대책’ 발표) 더 많은 주택공급을 위해 고층 아파트로 개발을 기다리는 모라토리엄(유예)의 공간이다.

저층 주택을 법제화(다세대의 경우 1984년)하고 건축을 독려한 지 40년이 채 안 됐다. ‘목동 철거민’(1983~5년), ‘사당 3동 철거민’(1985년)이 처연히 투쟁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세든 가정의 주거환경을 개선”한다고 도입한 집이다.2 집도, ‘세든 가정’도 이제는 서울의 천덕꾸러기다. 사라져야 할 곳이라는 낙인에도 과거 같은 철거민 운동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 아파트를 향한 욕망이 모든 시민의 정서로 여겨졌고, 그 바깥 다양한 거주 방식과 그를 둘러싼 불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별달리 관심 없을 질문을, 그런데도 구태여 한다.

①소유하지 않았대도 분명 동네 주인인 저층 주거지 주민이 ②부서질 집에서 ③떠나고 ④도시는 결국 무엇이 될 것인가.

①소유하지 않았대도 분명 동네 주인인 저층 주거지 주민이

2016년 서울연구원 조사를 보면, 저층 주택 자가율은 33%로 아파트(55%)보다 낮다. 재개발·재건축 예정 지역의 자가율은 곳에 따라 10% 안팎으로 내려간다고도 본다. 그러므로 저층 주거지는 세입자의 공간이다. 바뀌는 가구 구성을 아파트보다 앞서 겪는다. 1인 가구 비율은 27.5%, 유소년 대비 노인의 비율(노령화율)은 95.1%로 아파트 단지(9.7%, 55.3%)보다 크게 높다. 20~30대 사회 초년생도 많다. 2014년 기준 200만원 미만을 버는 이가 45%(아파트 23%)로 절반 가깝다. 반수 이상이 월평균 주거관리비로 20만원 미만을 내지만 주거비가 매우 부담된다는 이들은 20.4%로 아파트(10.4%)보다 많다.3 소유보다 거주, 소득수준과 생활양식에 맞춰 나름의 삶을 꾸린 공간이다.

다만 낡았다. 저층 주거지 주택 3분의 1이 지은 지 30년 넘었다. 낡고 위험하다는 점은 개발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낡은 이유를 연식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30년은 건축물 수명으로 모호한 나이다. “저층 주거지는 정비사업(재개발·재건축 등)을 위한 유보지로 취급됐다. 정비사업에 대한 기대로 관리가 소홀했고, 주거지 정비를 위한 정책에서도 소외돼 관리기준도 마련되지 않았다.”(‘서울시 저층 주거지의 실태와 개선 방향’) 방치하여 낡았으므로, 철거해야 할 곳이 됐다. 철거될 곳이므로 다시 방치했다. 끝내 어떤 곳은 정말 철거가 임박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처럼.

②부서질 집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은 전면 철거를 동반한다. 1973년에서 2020년 사이 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완료된 서울 625개 재개발 구역의 철거 대상 주택(기존 주택)은 약 5만2천 호다. 서울 재건축 지역에서 사라진(질) 기존 주택은 18만3314호다(1989~2020년).4 재개발·재건축의 목적이야 도시 공간의 효율적 이용, 좀더 쾌적한 주거환경 같은 공공성이다. 실제로 부수는 힘, 부술 곳을 정하는 동력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재개발·재건축 흐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집값이다.

서울 재개발 시행면적(시행 중 기준)은 대략 2011년을 정점(92만4천㎡)으로 2013년(18만4천㎡)까지 줄어드는 흐름을 보이다가 다시 늘어난다. 2019년 55만9천㎡에 이른다.5 재건축도 조합 수(조합설립 인가 이후 합산)를 기준으로 2013년 바닥(20개)을 치더니 2020년에는 40개에 이른다.6 고저는 대략 아파트 가격 흐름을 따른다. 2013년, 아파트 매매가격이 바닥을 짚은 해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 정책이 시작되며 아파트 가격은 상승세로 접어들었다. “민간 중심인 재개발·재건축에서 이윤 동기는 절대적이다. 정작 개발이 필요한 곳도 이윤이 없으면 개발되지 않는다.”(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부동산이 뜨거우면 더 높은 분양가를 받아 사업성(이윤)을 높일 수 있다. 그 앞에 이대로 머물고 싶은 모두의 목소리가 묻힌다. 살고자 하는 세입자의 바람만이 아니다. 임대소득이 절박하거나 분담금을 내기 어려운 영세한 집주인도 목소리 낼 여지가 준다. 개발은 추진된다. 소외된 이들은 떠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서울시 뉴타운 재개발 이후 원주민 재정착률은 8~15% 정도로 본다.7

③떠나고

철거된 집을 뒤로하고 저층 주거지 주민은 어디로 가는가? 각자 사정은 다를 텐데 경향을 따져볼 뿐이다. 2000년대 서울 은평 뉴타운과 금호 재개발, 대구 중구 삼덕동 주거환경 개선 사업지 이주자를 조사해본 결과, 정비사업으로 철거된 가구가 9㎞ 이상 멀리 이주하는 비율은 16.1%였다. 재개발과 무관하게 이사한 가구(7.7%)에 견줘 그 수치가 두 배 넘게 많았다.8 재개발로 인한 비자발적 이주자들이 개발 이후 오른 주변 지가,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해본다.

물론 재개발은 일정 비율 임대주택을 짓도록 한다. 다만 이 임대주택이 철거된 집에 머물던 이들을 위한 공간이 되기엔 벽이 많다. 무엇보다 물량이 적다. 1983~2020년 서울에서 재개발을 완료해 마련한 임대주택은 6만 채 수준이다. 그나마 임대주택 의무 건설 비율이 낮은 재건축(준공 기준)으로는 6857채를 지었다.9 이때 짓는 임대주택은 민간임대주택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시장 임대료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거나 비슷하다. 소득이 낮아 저층 주거지를 택했을 가능성이 큰 세입자가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임대료도 덩달아 오른 그곳에 정착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게 떠나야만 하는 이들의 감정을 2011년 연구했다. 당시 재개발 풍문 단계(천호 지역), 뉴타운 지정 단계(장위 지역), 퇴거 임박 단계(미아 지역) 지역 주민을 조사했다. “사업단계가 진행될수록, 비자발적 주거이동이 현실화되고 그 영향을 받는 시점이 임박할수록… 또한 연령이 높을수록, 경제적 역량이 적을수록” 불안·초조, 소외감, 강박감, 억울함, 분노 같은 정서적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공공임대주택의 제공이 상대적으로 세입자들의 심리적 안정에 기여했다.”(권은선·김광중, ‘주택 재개발에 따른 비자발적 주거이동이 세입자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공공임대주택은 재개발·재건축 지역에 적으므로, 그리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될 이야기는 아니다.

④서울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에게 상계동은 방값 싸고 일터가 있고 정든 이웃이 있는 유일한 생활의 근거지였다”는 내레이션, 뒤이어 내쫓김, 아이처럼 주저앉아 “억울해, 억울해” 우는 어른들이 교차하는 1980년대의 풍경이 있다.(김동원 감독,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 지나간 시절처럼 보인다. 퇴거 과정의 폭행과 죽음이 부각되는 일은 최소한 용산 참사 이후 드물고(물론 2018년 서울 아현동 철거민의 죽음 같은 예외는 많다), 국가는 전투경찰을 앞세운 폭력의 주체라기보다 나름 공공재개발·재건축 같은 여러 방식으로 밀려나는 세입자를 지키려는 것처럼도 보였다.(물론 여전히 공공임대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개발사업의 경우 세입자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규정도 만들었다.(정비구역 지정부터 시행까지 10년 가까운 현실에서, 정비구역 지정 3개월 전부터 이주까지 사는 희귀한 경우만 세입자로 인정받는다는 한계가 있다. 재건축은 이런 규정마저 적용되지 않는다.)

2021년의 철거는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사업성 개선, 시장 원리, 그러므로 평범한 욕망과 욕망이 만나 빚은 결과물에 가깝다. 누구를 향해 분노해야 할지조차 모호하다. 분담금을 걱정하는 소유주? 전 재산에 대출까지 끌어다 투자하겠다고 몰려든 숱한 투자자들?

“그러니까, 덜 심각하다, 그렇게 볼 수 없어요. 오히려 근본적으로 들어가야 풀리는 문제가 됐습니다.”(김성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 부동산 가격 상승기에 제어되지 않으며, 때로 공급 부족을 이유로 독려하는 재개발·재건축은 서울에 살 수 없는 사람의 저변을 가파르게 넓힌다. 부담 가능한 가격의 주택이 사라지고, 대신 비싼 시장가격이 붙은 고급 아파트가 늘어난다. 오른 아파트 가격은 다시 부수고 새로 짓는 동력이 된다. 이 격차를 메울 수 있는 건 현재로선 정부의 ‘저렴 주택’ 공급뿐인데 주택 시장가격이 오를수록 정부의 부담도 늘어난다. 지키지 못할 영역은 넓어진다.

그런 악순환의 끝, 서울은? “살기 위한 목적으로 관리하기보다 끊임없이 부수고 짓기만 반복하는 도시.”(김성달 국장) “도시의 생명인 다양성, 노인도 젊은이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같이 살 때 나오는 경쟁력은 완전히 사라진 도시.”(최은영 소장) 사는 공간, 일하는 공간, 교류하는 공간, 깨닫는 공간 같은 것을 도시라고 여긴 이들에게는 절망적인 풍경이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참고 문헌
1·3. 맹다미·장남종·백세나, 서울연구원, ‘서울시 저층 주거지 실태와 개선방향’, 2016
2. <매일경제> 1984년 11월19일치, ‘본궤도에 오를 다세대주택 건축법 개정안 내용’
4·6·9. 국토교통부, ‘주택·도시정비사업 현황’
5. 서울시 열린데이터 광장, ‘서울시 주택재개발사업 추진실적 통계’
7. 국토교통부, ‘함께하는 희망 도시재생’
8. 임은선·유재윤·김걸, ‘도시정비사업에 따른 원거주민의 이주패턴과 거주행태 변화 분석’,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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