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온 마을이 세 아이를 키웁니다

유일하고 딴 데 없는 시집 낸 전국 8대 오지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람들
등록 2021-07-05 06:59 수정 2021-07-06 01:54
전북 완주군 동상면 최고령자인 101살 백성례씨가 박병윤 동상면장과 함께 자신의 시를 담은 액자를 들었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최고령자인 101살 백성례씨가 박병윤 동상면장과 함께 자신의 시를 담은 액자를 들었다.

2021년 6월 어느 날, 시집 한 권이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발신인은 전북 완주군 동상면 박병윤 면장. 마을 사람 100여 명의 말을 모으고 추려 시로 뽑아 낸 시집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겨리)입니다. 한창 ‘지방소멸’을 분석하는 숫자와 씨름 중일 때였습니다. 시집을 낸 그 마을도 ‘소멸 위험 지역’이더군요. 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부연구위원이 2016년 3월 국내에 처음 소개한 ‘소멸위험지수’에 따른 것입니다. 65살 이상 고령 인구가 20~39살 여성 인구의 2배를 넘으면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합니다. 동상면은 2020년 5월, 65살 이상 고령 인구가 20~39살 여성 인구의 5배를 넘었습니다.
‘소멸 도시’는 숫자에 갇혀 있습니다. 2020년 5월 전체 읍·면·동 3545곳 가운데 1702곳(48.0%)이 소멸 위험 지역이라는데 그 일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소멸 위험에 처했지만 시를 짓는 마을이 궁금해집니다. 2021년 6월23~25일 2박3일간 101살 어르신부터 5살 아이까지 만나 마을 수몰 역사부터 키우는 개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숫자 또한 현실입니다. 1970년 마을엔 3657명이 살았고, 지금은 1084명이 남았습니다. 50년 전엔 10살 아래 아이가 1257명이었는데, 지금은 37명이고요. 먼 미래에 고향 동상면을 기억할 사람의 수이기도 합니다. 마을 전체가 한 아이를 키우는 곳, 어르신 한 명이 곧 역사인 그 마을을 떠날 때 쯤 ‘소멸’이란 단어가 무겁게 남았습니다.
정부는 2021년 하반기에 ‘인구 감소 지역’을 처음으로 지정해 고시할 예정입니다.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하나의 실험으로 ‘청년마을’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2018~2020년 청년마을 한 곳씩만 지원했는데 2021년엔 열두 곳으로 늘립니다. 그만큼 정부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출구를 찾는 것이겠죠. 그 맨 앞에 서 있는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을 만나 지방소멸과 청년마을에 관해 들었습니다._편집자주
동상면 원신마을에서 동상주조장을 이어가는 김호성씨.

동상면 원신마을에서 동상주조장을 이어가는 김호성씨.


*글 사이에 담긴 시는 동상면 주민들과 박병윤 동상면장이 쓴 시집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에서 인용했습니다.

산 중턱에 올라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순간 ‘짜잔’ 하고 마을은 기적처럼 나타납니다. 누군가는 ‘이런 데 마을이?’ 싶어 놀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압도적인 산 틈새로 삐죽 내민 사람 흔적에 괜히 뭉클할 수도 있겠습니다. 전북 완주에서 전주를 거쳐 군산 앞바다로 흘러가는 만경강이 시작되는 곳, 전북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❶밤티마을입니다.

밤티마을에는 박영환(43)·박지현(36)씨네 가족이 삽니다. 나윤(10)·채언(5)·진규(3) 세 아이와 강아지 미오랑 딸기를 키웁니다. 미오는 도시(전주)에서 데려왔고 딸기는 비 내리는 날 불편한 다리로 졸래졸래 따라오기에 데려다 키웠습니다. 가족은 2018년 말부터 밤티마을에 자리잡고 생태학습장 ‘꿈나무 체험관찰학습장’(체험장)을 운영합니다. 감과 고로쇠, 표고 같은 임산물로 먹고살던 동네라 체험장은 마을에 불어온 새바람이었습니다. 체험장에선 관찰할 만한 오리, 꿩, 금계 같은 조류도 키웁니다. 동상면은 겨울에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는 곳이니까 깃털 있는 조류를 키우기에 좋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개 은근히, 때로 대놓고 박씨네 가족에게 마음을 씁니다. 무엇이든, 키우고 자라는 집은 동상면에 귀하니까요. 2020년 기준 동상면에서 10살 미만 아이는 37명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167명이었습니다. 50년 전에는 1257명이었습니다.

6월23일에서 25일까지 2박3일, 동상면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서울에서 고속열차 KTX로 1시간30분쯤 걸리는 전주역에서 택시 타고 30분 정도면 갈 만한 곳이니, 산속에 꼭꼭 숨은 동네이긴 해도 멀지는 않습니다. 산과 강을 실컷 구경할 생각입니다. 다만 50년, 그 사이 어느 땐가 사라진 1200명 아이들도 잠깐씩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한데, 남아 있는 37명 아이를 향한 동네 사람들의 극진함 탓에 사라진 아이에 대한 아쉬움은 금세 잊혔답니다. 누군가 편리하게 동상면을 ‘소멸 마을’이라 부를 테고, 면 사람들도 딱히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동상면, 사실 그리 간단한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시골 울음소리 -박영환

요즘 시골은 애기 울음소리조차/ 듣기 힘들다 하지요/ 그런데 우리 집은/ 나윤이, 채언이 울음소리 (…) 동물과 곤충 아빠 노릇까지 해야 하니/ 자식들이 참 많기도 하지요

1. 장난친 아이

무엇이 동상면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단 하나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연환경과 거기 적응한 삶의 양식과, 난데없이 치고 들어오는 현대사의 굴곡이 뒤엉켜 동상면을 이룹니다. 일단 면 곳곳을 둘러봅니다. 완주군 동쪽, 서울 여의도 면적의 스무 배가 훌쩍 넘는 넓은 땅에 17개 마을이 산 틈새, 강 틈새로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밤티마을을 지나 다시 5분쯤 차를 달려야 ❷거인마을입니다. 거인마을은 동상면의 중심지입니다. 면사무소도 있고 별정 우체국도 있습니다. 우체국은 돌아가신 김진갑씨가 만들었는데, 동상면 명물인 감식초 제조법을 개발한, 이를테면 그 시절의 혁신가로 존경받습니다. 감식초를 알리려 신문 인터뷰에 나가선 (당황스럽게도) 이런 소신 발언을 하셨다지요.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정책은 좀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중앙일보> 1991년 9월24일치 ‘홍시 묵혀 만든 감식초 당뇨병 등에 효험’)

원래 동상면의 중심이라고 하면 이보다 더 위로 올라간 ❸원신마을 앞쪽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저수지입니다. 1960년대 익산과 군산에 농업용수를 댈 요량으로 동상저수지를 짓느라 예전 면사무소도 학교도 모두 물 아래 잠겼습니다. “얼마 안 된 얘기여, 그래 봐야 50~60년?” 원신마을 동상주조장 주인 김호성(67)씨가 어제 얘기처럼 툭, 수몰 마을 얘기를 꺼냅니다. 1964년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답니다. “저그 돌 위가 원래 면사무소 자리, 그 뒤가 우리 집. 그리고 저기가 원래 동상주조장 자리. 주조장에서 쫑이라는 개를 키웠는데 엄청 짖어쌌어. 쫑쫑쫑.” 기억이 생생한 건 어쩌면 그해 여름 더위 때문. “근디 집을 다 못 짓고 올라왔어. 그 적십자 천막 알지? 거기에 난민처럼 살았는디, 끔찍하게 더웠다니께.”

다시 원신마을에서 차를 달려 저수지를 건너가면 수만리 ❹단지마을이 나옵니다. 박병윤(52) 동상면장이 나고 자란 데입니다. 지금이야 수만리 동네들과 다른 마을을 잇는 다리가 놓였지만 예전에는 통통배가 아니면 장 보러 갈 수도, 학교에 갈 수도 없는 깡촌이었답니다. 면 사람들은 “면장은 크게 될 사람이여”라고들 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사회적경제를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데다 시인 등단까지 했습니다. 정작 본인은 “그런 데는 별 관심이 없고 그냥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재미있게 사는지, 박 면장은 마을 어르신을 만나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면장은 아직 50대, 동상면에서는 한참 어린 나이입니다. 성격마저 장난꾸러기처럼 발랄하니 어르신들은 귀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한 표정입니다. 그래도 장단을 맞춰주려 어깨를 들썩들썩합니다.

2020년 고향 면장이 되고 나서도 박 면장은 가만있지를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 100여 명의 말을 채집하고 추려 시집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겨리 펴냄)를 냈습니다. “초장, 고추장 안 치고 들은 말을 그대로” 적은 시집이라, 면 사람들이 돌연 (구술) 시인이 됐습니다. 마을 시인들 얘기가 신문과 방송에 소개됐습니다. 그래서 요즘 동상면은 “다들 좀 신난 분위기”(박영환씨)랍니다. 주목받은 건 그저 신기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상면만의 유일한 가치 같은 걸 봐주신 게 아닐지.”(박 면장)

그렇습니다. 면 사람들은 ‘유일’ ‘딴 데 없는’ 같은 단어를 동네를 얘기하며 자주 썼는데, 과장이나 거짓은 아닙니다. 기능에 맞춰 엇비슷하게 설계된 도시와 달리 동상면 마을 곳곳은 그냥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개발연대 같은 세상의 굴곡과 동상면만 가진 자연조건, 적응해온 사람들이 부딪치며 쌓아온 동상면만의 ‘유일하고 딴 데 없는’ 모습이 시집에 예기치 않게 담겼습니다. 이를테면.

막걸리 맛은 말여 -김호성

동상저수지 안에/ 주조장을 묻었고/ 4학년 초등학교를 묻었지 (…) 감을 깎고 표고버섯 재배하고/ 산에 들에 밭일하면서/ 배고픔과 고달픔을 달래던/ 농주여

완주군 동상면을 흐르는 만경강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들.

완주군 동상면을 흐르는 만경강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들.

2. 떠난 아이

실은 박 면장도 주조장 김호성씨도 동상면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동상면의 인구 감소는 1960~1980년대 시골 곳곳을 싸고돌던 익숙한 그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지긋지긋했다”고들 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산촌이라 논밭이 얼마 없는데 그마저 저수지에 수몰돼 더 줄었습니다.(동상면의 호당 평균 경지면적은 지금도 0.46ha(헥타르) 정도, 2018년 기준 우리나라 농가의 호당 평균 경지면적은 1.56ha입니다.)

다만 하나, ‘고종시’로 부르는 감이 무척 유명했습니다. 씨 없는 감인데, 고종 황제가 그리 좋아해 고종시로 이름 붙었다는 말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완주군 고산면의 동쪽에서 나는 감이라는 뜻의 ‘고동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더 유력해요.) 하지만 땅이 좁아 역시 큰 농사는 되지 못했습니다. 고단했습니다. “지게 짊어지고 산 헤집고 다니면서 감 따고 나르고 깎고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를 거여.”(김호성씨) 그 와중에 “넘들 노름돈 대주다가 재산을 탕진한 아버지”는 얼마나 얄미웠던지요.

박 면장은 고향에서 도망쳐 서울로 대학 갔습니다. 김호성씨도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세계전도대회에 몰린 사람들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대로 서울에 눌러앉았다네요. 그때도 인파가 몰린 서울은, 휘황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젊은이가 하나둘 떠나고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인구는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박 면장도 면사무소에 걸린 현황판 숫자 앞에 근심 어린 표정을 짓습니다. 인구수 1084명(완주군의 1.2%)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상면이 전국 8대 오지라고 하니 인구가 적은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1970년에는 3657명이나 살았습니다. “몰러. 그때는 집집마다 애들만 낳았는지. 우리 집만 해도 7남매. 근데 요즘은 안 낳고, 젊은 사람도 없고.”(김호성씨)

20~39살 여성 인구를 65살 이상 인구로 나눈 동상면의 소멸위험지수는 0.194(2020년 5월 기준)로 계산됩니다. 소멸 고위험 지역(소멸위험지수 0.2 미만)입니다. 놀랍지 않습니다. 드물지 않으니까요. 전국 읍·면·동 지역 3545곳 가운데 1015곳(28.6%)이 소멸 고위험 지역에 속합니다. ‘소멸’이란 단어가 어딘지 기분 나쁘게 들릴까 싶었는데, 박 면장은 인정하고 맙니다. “소멸 위기는 맞죠. 밤티마을 다섯 살 채언이 시를 보면 영수, 철수가 아니라 강아지 미오랑 딸기가 나와요. 밤티마을 안에는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 거죠.” 자책처럼도 들립니다.

강아지 -박채언

우리 집 강아지 미오는 안아달라고 멍멍멍/ 우리 집 강아지 딸기는 안아달라고 월월월

동상초등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

동상초등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

3. 돌아온 아이

꼴도 보기 싫어 면장 자신도 떠나온 고향. 그런데요,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는 모양입니다. 쳐다도 보기 싫어 묻어둔 무언가를, 불쑥 다시 꺼내보는 순간. 박 면장은 마흔 넘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알고 지내는 윤흥길 소설가한테 이런 말을 들었대요. “저 돌멩이 하나가 선생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저렇게 작아지기까지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어요. 돌멩이 우습게 보면 안 돼요.” 소설가는 돌멩이 얘기를 했는데 박 면장한테는 자기 고향 얘기로 들렸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과 기억이 그 지긋지긋한 마을에 서려 있었습니다.

돌멩이 같은 사연의 무게로만 치면 면 전체에서 101살 백성례 할머니를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조용히 동네를 거닐다가 가만가만 사람들을 챙깁니다. 귀가 조금 어둡지만 허리는 어찌나 꼿꼿하신지요. 집 앞 평상에 앉을 때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일본놈들 얘기, 6·25 얘기를 할 때 믿을 수 없는 에너지를 쏟아냅니다. “감 깎아놓으면 다 가져가고 나락 모가지 하나하나 시어가지고 일본놈들이 공출혀 가고.” 동상면 감은 일제강점기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니 탐낼 법했습니다.(1938년 <조선일보>에 몇 차례 소개되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때) 이 동네 사람 겁나게 죽었어요. 그때 내가 애기를 하나 낳았는디 애 업고 피란 나가서 얻어먹고 댕길라 카는디.” 산골 깊은 동상면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 잔당이 득실했습니다.(‘동상면 좌익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으로 불립니다. 1950년 9월 면민 1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상면의 모습과 불행한 한국사, 할머니의 삶이 겹치는 어느 지점이 순식간에 확 열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박 면장은 처음 할머니가 말씀을 쏟아내던 날, 그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답니다.

자운영꽃 눈물 -백성례

전쟁 난리 때 내가 소양 너머 공덕에 피난살이할 때 애기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백순필 이성녀를 찾으러 동상면 수만리 입석을 갔지

밤티마을에서 체험관찰학습장을 운영하는 박영환·박지현씨 가족.

밤티마을에서 체험관찰학습장을 운영하는 박영환·박지현씨 가족.

4. 새로 온 아이

동상면의 지긋지긋한 절대 가난은 이제 옛말입니다.(김호성씨는 “몰러 나만 빼고 다 잘들 사는 것 같어”라고 말하며 입을 빼죽합니다.) 그래도 도시로 쏠리는 마음은 박 면장이나 김호성씨가 동네를 떠났던 예전보다 한층 더한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면사무소 직원과 옆 도시 전주까지 불어닥친 아파트값 폭등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어요. 10억원 넘는 아파트도 생겼다고요. 그런 세상에 아랑곳없이 동상면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주에서도 학구열이 꽤 있던 동네에 살던 체험장 박영환씨네는 아이에 대한 욕심 때문에 동상면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아이 욕심 많거든요. 근데 지혜롭고 현명하고 건강하고 효를 아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는 욕심. 그러려면 답을 주기보다 스스로 체험할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주에 사는 동안에도 욕심을 부려봤습니다. 병아리 부화도 해보고, 곤충도 길러보고, 미술관으로, 동물원으로 아이를 열심히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딘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버지 고향인 동상면에 터를 잡고 직접 생태체험 교육사업을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집 마당에 오리가 뛰어다니고, 밤에는 등불을 켜고 곤충 채집을 합니다. “이제 동물원에 갈 필요가 없죠.”

아름다운 길 -박지현

남들은 패스트푸드를 사러 편의점으로 가지만/ 나는 싱싱한 채소가 자라는 텃밭으로 가요

아름다운 동네인 건 분명했지만 적응은 저절로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답니다. “로마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데 여기 문화를 이해 못한 거예요.”(박지현씨)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에 땅을 기부한 조상에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겨울에 여는 밤티마을 썰매장 운영부터 자잘한 거리 단장까지 주민이 직접 나서야만 일이 된다는 것도요.

이 틈에서 젊은 부부가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까지 몇 달 걸렸습니다. 불 켜진 어르신 집이 보이면 무작정 술병을 들고 찾아가 말을 걸었답니다. 해보고 싶은 마을 일을 어르신들이 얘기해주면, 서류를 만들고 회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가며 군 예산도 받아왔습니다. 점점 믿어주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맡는 일도 늘었습니다. 요즘도 마을 예술·인문학 아카데미를 준비한다고 정신없습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네요. 그런데요, 엄청 재밌어요. 해보니 뭔가 되는 걸 동네 사람들이랑 다 같이 보잖아요.”(박영환씨)

다만 하나 아쉬운 건 또래가 없다는 점. 박영환씨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부가 귀촌 지원을 많이 하지만 대부분 농사짓는 일에 지원이 몰려 있어요. 그런데 여기 살면서 재택근무를 하고 싶은 젊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저희처럼 교육사업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다양한 사람들한테 귀촌 지원이 많으면 동네도 재밌어질 거예요.” 1990년대 감식초를 내놓으며 김진갑 우체국장이 했던 ‘동상면 혁신’ 고민을 2021년 박영환씨가 합니다. 아무리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고종시’라지만, 고령화에 기후위기까지 겹쳐 감농사도 예전 같지 않거든요.(특히 2020년에는 냉해로 감 소출이 예년의 30% 수준이라고 면사무소 직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연석산미술관 박인현(64) 관장은 체험장 박씨네보다 2년 앞선 2016년 미술관을 짓고 동상면에 자리잡았습니다. 박 관장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그림이 실린 유명한 동양화가입니다. 우산을 주요 소재로 삼습니다. 박 관장한테 작품 속 우산의 의미를 물었는데 묘하게 동상면 원주민, 그리고 새로 들어온 주민들의 관계 얘기처럼 들립니다. “우산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했어요. 이렇게 하나둘 모이면서 형상을 이루기도 하고요. 우산과 비의 관계도 흥미로워요. 어떻게 보면 내리고 막는 관계이지만 누구도 대립으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마침 동상면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그냥 이런 날을 좋아합니다.”

연석산미술관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해 국내외에서 온 젊은 작가들이 상주합니다. 동상면 풍경, 사람들, 역사를 담은 작품도 만듭니다. 얼마 전에 박씨네 둘째 채언이도 소 그림을 그려 미술관에 전시하고 그리 좋아했다지요. 백성례 할머니는 재작년 초상화 모델이 되었고요. “잘 보이지 않는 산촌 사람들의 삶도 하나하나 존엄하다”고 박 관장이 말했는데, 시집 덕분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 길 -설유정 연석산미술관 큐레이터

고통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믿음으로 희망을 가꾸며

1960년대 동상저수지 수몰 주민이 이주해 만든 전북 완주군 동상면 원신마을과, 동상면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동상초 풍경.

1960년대 동상저수지 수몰 주민이 이주해 만든 전북 완주군 동상면 원신마을과, 동상면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동상초 풍경.

5. 귀한 아이

찌는 듯한 오후 2시, 동상면 온 동네 아이들(21명)은 동상초에 모여 있습니다. 이제 동상면에 하나 남은 학교입니다. 코딩을 배우던 아이도 바이올린을 켜던 아이도, 학교에 들어선 임진희(49) 열린마을 농촌유학 센터장을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모릅니다. 동상초에 다니는 동상면 아이는 6명, 나머지 15명은 농촌유학 온 아이들입니다. 모두 임씨네 유학센터에 머뭅니다. 농촌유학은 도시 아이들이 유학센터를 집 삼아 먹고 자고 생활하며 시골 학교에 다니는 교육 방식입니다. 10년 됐습니다. 그러니까 임 센터장은 동상초에 10년째 가장 많은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인 셈입니다.

임 센터장도 원래 동상면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였습니다. 아이가 학교 갈 나이쯤 되니 걱정됐습니다. “학교가 너무 작아서 전주로 이사할까 싶었어요.” 그때 마침 동상초를 혁신학교로 만들고 있던 이병희 전 동상초 교장을 만났습니다. “유학센터 얘기를 하면서 관련 모임이 있으면 저를 꼬박꼬박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그렇게 유학센터를 시작했습니다. 유학센터와 학교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학교가 좋아져야 농촌유학이 늘고, 센터가 좋아야 학생 수가 늘어납니다.

학교가 좋아졌습니다. “동상초가 전북에서 최고로 좋은 학교”라고 면 사람들은 신나서 자랑합니다. 그럴 만합니다. 2016년 교육과정 최우수학교에 뽑혔거든요. 교문만 나서면 숲이며 강이며 현장 학습장이 지천에 널려 있는 조건이야 당연합니다. 복도에는 로봇이 있는데, 선생님들은 “어제 로봇 실습을 해서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미술 교육은 연석산미술관에서 소개한 작가들이 와서 지원하고, 체험학습은 박씨네 체험장이 도와줄 계획도 세우고 있습니다. “한 마을이 아이 키운다는 게 도시에서는 구호로만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여긴 정말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임 센터장)

학교는 온 마을 사람이 힘을 합쳐 지켜야 하는 데입니다. “띄엄띄엄 마을이 흩어져 있는 동상면의 특성 때문에 학교마저 사라지면 주민들은 각자 고립인 거죠. 그런 상태로 젊은 학부모들이 들어오는 건 상상할 수도 없고요.” 다만 어디까지나 “첫 번째 목표는 아이들. 아이들이 행복한 동네”입니다. 동상면의 발전이나 활기 같은 건 어른들의 사정일 뿐, “아이들이 행복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올 것”이라고, 임 센터장은 10년 학부모로 지내며 얻은 깨달음을 전합니다.

폭포가 전하는 말 7 땅콩 -박병윤

농부는 이 땅에 다시 땅콩을 심을 것이다.

다섯 살 채언이가 어린이집(어린이집은 옆동네 소양면으로 다닙니다)을 마치고 백성례 할머니네에 왔습니다. 할머니는 채언이 앉으라고 평상에 떨어진 나락을 훔쳐냅니다. 채언이는 씨앗 껍질을 벗겨보고 꽃봉오리 속에 숨은 벌을 보느라 여념 없습니다. 낯을 가리는 눈치였는데 어느새 할머니한테 폭 안겨 있습니다. “예쁜 거 사줬구먼.” 반짝이는 채언이 신발을 할머니는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아흔 살 좀 넘는 나이 차이야 동상면에서 별것 아닙니다.

동상면에 남은 아이 37명, 그 가운데 한 명인 채언이한테 어른들은 조금 미안한 눈치입니다. 정작 채언은 특별한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건? “미오.” 그럼 딸기는? “딸기도.” 사진 찍자는 얘기에 카메라를 준비하기 전부터 브이(V)자 손 모양을 하고 꾹 참고 있습니다.

채언이도 언젠가 면장님처럼, 할머니처럼 재밌고 단단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동상면에 머물며 마을을 돌볼 수도, 도시로 나가 다른 일을 해볼 수도 있을 테지요. 어디 있든 동상면을 고향으로 기억할 텐데, 그렇게 기억할 또래가 전국에 딱 37명뿐일 테니, 정말 귀하디귀한 아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완주=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