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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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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을 권리

등록 2021-06-12 15:36 수정 2021-06-16 02:14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5월은 대학생 과제의 계절이다. 덕분에 노조 전자우편과 공식 휴대전화, 페이스북 등으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주로 교양수업 과제를 하려는 학생들인데 개중에는 고등학생도 있었다. 교육과정에서 학생에게 노동조합이나 사회문제를 주제로 과제를 던져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노조가 응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가끔 서면 인터뷰도 요청하는데, 질문에 서면으로 답하려니 학생이 아니라 노조가 과제를 하는 것 같았다. 컴퓨터 화면에 “교수님 과제 조금만 내주세요!”라고 썼다가 지우기도 했다.

감당이 안 되니 답변을 포기해버렸는데, 막상 거절하거나 답을 못하거나 연락이 늦으면 노조에 대한 시선이 안 좋아질까 불안하다. 종종 인터뷰한 언론지망생이 어엿한 기자가 돼서 나타나거나 연락을 깜빡한 사람을 다른 행사에서 만나기도 하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기업처럼 연봉 수천만원을 주고 홍보팀을 꾸릴 수 없는 노조 처지에선 이런 업무를 하지 않을수록, 조합 본연의 업무를 할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 많은 말

대학생 과제만이 아니다. 가끔 이른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배달과 관련해 자극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다. 최근 경비원이 줄을 잡아당겨 라이더가 넘어졌다는 이른바 ‘라이더 사냥 트랩(덫)’ 사건이 화제가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일 뿐이고 사실관계가 정확히 밝혀지지도 않아서 말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게다가 피해자와 연락되는 상황이 아니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수많은 통화 중 가장 마지막에 전화한 기자에게 짜증을 냈다.

온종일 논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라이더유니온은 논평을 썼다. 라이더와 경비원의 문제는 경찰이 판단해줄 것이고, 우리가 고민하고 시끄럽게 떠들어야 할 것은 비 오는 날 라이더가 지하주차장에 들어갔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 문제라는 내용이었다.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사람이 글을 지우자 관심은 사그라졌고, 라이더유니온의 논평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요즘 굳이 반응하지 않아도 될 일에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며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사이버레커’(교통사고가 나면 달려가는 레커(견인차)에 빗댄 것)란 말까지 만들어졌겠는가. 반면 꼭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온전히 자신만의 시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말하기 위한 준비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교류하는 시간적·공간적 여유가 없으면 소통과 질문을 가장한 일방적 말하기만이 어지럽게 부딪칠 뿐이다.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으로 말하고 싶은 것

테니스 프랑스오픈에 출전한 일본의 오사카 나오미 선수가 기자회견을 거부했다가 대회조직위원회로부터 징계받고 기권까지 했다는 뉴스를 봤다. 오사카는 ‘반복된 질문’에 답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고 특히 패배 뒤 인터뷰는 ‘넘어진 사람을 발로 차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시합의 승패, 자신의 정신적 상태와 상관없이 인터뷰해야 하고 악플을 감당해야 하는 운동선수의 압박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오사카는 말하기를 포기한 게 아니라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해 뛰는 모습으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에게도 쉼과 여유가 필요하듯, 시민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관전평을 늘어놓기보다 중요한 건,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세상에 벌어지는 무수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자기 길을 가는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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