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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 보이는 것, 안 보는 것

등록 2021-04-17 10:52 수정 2021-04-20 01:4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어, 이렇게 가까운 곳에 데이케어센터가 있었네? 언제 생겼지?’ 집으로 가는 골목에서 데이케어센터(주간보호시설)를 발견한 날부터 자주 다니는 동선마다 위치한 요양병원, 요양시설, 데이케어센터들을 거의 매일 새롭게 발견했다. 새로 생겨서가 아니라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 있는 데이케어센터는 오픈한 지 3년이 넘었다는데, 나는 2년 넘게 매일같이 그 길을 오가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입장이 변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본다는 것은 근대 이후 앎과 지식체계에서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잘 알려졌다시피, 보는 것은 단지 눈이라는 신체기관의 ‘자연스러운’ 기능만은 아니다. 착시에 대한 실험과 뇌과학의 발견들, 목격자들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는 범죄학 연구, 사회에 만연한 남성적 응시(male gaze)와 시선의 권력에 대한 페미니스트 문화 비평 등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관계, 그리고 ‘안 보는’ 권력에 대해 논의해왔다. 즉 본다는 것은 시각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적 위치와 입장, 그리고 세계관의 산물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많은 것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보거나 혹은 전혀 보지 못한다.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는 사람은 자기 집 화장실에서 문턱을 처음 발견하고, 휠체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공중화장실 한 칸 크기를 처음 가늠한다. 집 앞 데이케어센터 존재를 얼마 전에야 발견한 것도 단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번 눈에 들어오자 그때부터는 오며 가며 지나칠 때마다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4·7 재보궐선거를 치르면서는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투표는 했을까? 할 수 있었을까?

서울시에 등록된 노인요양시설은 200개가 넘고 거주인원은 1만2천 명을 훌쩍 넘지만(2019년, 서울시 공공데이터), 10인 이상 거소투표자가 있으면 의무적으로 투표소를 설치해야 하는 ‘공직선거법’(제149조)에 따라 이번 4·7 재보선에서 거소투표 기표소가 설치된 기관은 30개 남짓이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나머지는 어떻게 됐을까? 10인 미만이라 개별적으로 우편투표를 했을까? 그 전에, 거소투표를 신청하겠냐고 의사를 물어봐주는 누군가가 있었을까? 기표 행위가 어려울 때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투표용지가 담긴 우편봉투를 대신 부쳐줄 사람이 있었을까? 그 사람은 언제 우체국에 갈 수 있었을까? 점심시간을 줄여 허겁지겁 다녀왔을까?

요양시설에서 투표하는 상상

집 앞 데이케어센터가 ‘보이게 된’ 때부터, 내가 요양시설에 가는 상상을 가끔 한다. 요양시설에서 살 때 선거가 다가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거소투표제도를 알게 됐으니 미리미리 신청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와상 상태로 사는 것이 버거워 선거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어질 수도 있고, 누워 있는 입장에서는 모든 후보가 그 나물에 그 밥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망한’ 선거 결과와 이런저런 분석을 마주하며,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그리고 때로는 아주 적극적으로 ‘안 보기로 작정’하는지를 생각한다. 어떤 시민에게, 이번 재보선은 ‘딴 세상 이야기’였을 것이다. 늙어가는 몸, 찾아오는 질병은 그 자체로 개인이 홀로 마주하는 ‘딴 세상’이다.(‘갑자기 팔을 들 수 없다니!’) 그 ‘딴 세상’은 원래부터 딴 세상이었다기보다 취약성과 의존성을 못 보고 안 보는 지배 문화에 의해 ‘딴 세상’이 된다. 하지만 그 딴 세상을 들여다보고, 왕래하고, 서로의 세상에 더 자주 초대하며 삶을 나누는 일은 가능해져야 하지 않을까. ‘딴 세상’에서 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 미친 속도와 효율성의 세계가 얼마나 배제적인지 알아차릴 기회는 그럴 때 조금씩 다가온다.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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