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작대는 서울 홍익대 앞 거리에서 살짝 비켜난 골목길, 빨간 벽돌로 둘러싸인 3층 건물엔 플러스 사이즈 여성의류 쇼핑몰 ‘66100’의 쇼룸이 있다. 조심스레 들어서면, 행거에 촘촘히 걸린 화려한 옷에 눈길을 먼저 빼앗긴다. 한쪽엔 옷을 갈아입는 곳도 마련됐다. 66사이즈 이상 여성도 쇼핑할 때 즐거움을 느끼도록 고객이 직접 와서 옷을 구경하고 입어보고 살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3월9일 이곳에서 66100을 운영하는 김지양(35) 대표를 만났다. 그는 동명의 플러스 사이즈 패션잡지를 창간한 편집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들자 그는 능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바꿔달라, 거울을 봐달라, 마네킹에 손을 얹어보라. 여러 요구에 여유 있게 응대하면서도 렌즈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다. 영락없는 모델이다. ‘국내 최초 플러스 사이즈 모델답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기성복 ‘표준’ 사이즈를 넘는 모델을 가리킨다. 통상 한국 기준 ‘77사이즈’부터 플러스 사이즈로 본다. 기성복 브랜드에선 보통 옷 사이즈가 44(스몰), 55(미디엄), 66(라지)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66100도 ‘여성 사이즈 66, 남성 사이즈 100’인 기성복의 한계를 넘는 무한함을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존재를 한국에 처음 알린 인물이다. 데뷔는 미국 무대였다. 2010년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 로스앤젤레스’(Full Figured Fashion Week LA)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다. 2011년 베네통코리아가 주최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톱20에 이름을 올렸고, 같은 해 ‘아메리칸 어패럴 플러스 사이즈 모델 콘테스트’(American Apparel Next Big Thing) 온라인투표 부문에서 전세계 991명 중 8위를 차지했다. 2014년 플러스 사이즈를 다룬 패션 컬처 매거진 <66100>을 창간하고, 같은 이름의 여성 의류 쇼핑몰을 열어 운영해오고 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2010년, 외식조리학과를 졸업한 뒤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막 권고사직을 당한 그를 모델의 길로 이끈 건 이 한 문장이다. 모델 서바이벌 프로그램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도슈코>) 시즌1의 광고 문구였다. 부랴부랴 프로필 사진을 찍고 지원서를 냈다. 1차 서류심사는 합격했지만, 2차 수영복 심사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모델에 대한 열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프로필 촬영장의 조명 아래서 두근거리던 심장이 마치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미국은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도슈코>에서 떨어진 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친구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이 일을 하고 싶은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살을 빼서 여느 모델처럼 마른 몸으로 활동하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어요. (지금 그대로) 어디서 활동할 수 있을지 유럽 모델 에이전시 등을 알아보던 차에 미국에서 ‘풀 피겨드 패션위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죠.”
어떤 준비를 했나요.
“워킹 영상을 보내라고 했어요. 국내 유명 모델아카데미에 가서 걸음마를 다시 배우는 기분으로 ‘한 달 워킹 클래스’를 수강했어요. 할머니댁에 얹혀살던 때인데, 회당 10만원꼴 하는 강의를 네댓 번 들었죠. 그래도 보람은 있었어요. 심사위원이 ‘너 진짜 잘한다’고 해줬거든요.”
패션위크 주최 쪽에선 숙박비 등을 지원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돈을 긁어모아” 간 미국행이다. 호텔 숙박료가 부담돼 1박만 한 뒤 호스텔로 옮겨 주차장에서 워킹 연습을 했다. 할리우드 대로변에 있는 성인용품 가게를 헤맨 적도 있다.
“옷 입을 때 살이 울룩불룩해 보이지 않도록 특정 브랜드의 몸매 보정 속옷을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들어본 브랜드라 대체 뭔가 싶어 백화점에 갔는데 너무 비싼 거예요. 고민하다가 성인용품 가게를 갔죠. 왠지 비슷한 옷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웃음) 결국 비슷한 걸 사서 입고 런웨이에 섰죠.”
처음 런웨이에 서보니 어떻던가요.
“긴장하니까 자꾸 빨리 걷게 되더라고요. ‘미친 사람’처럼 나갔다가 들어온 기억이 나요.(웃음) 당시 총 7개 브랜드에서 모델로 선정됐어요. 참여 브랜드의 70%에 가까운 수니 꽤 많은 편이었죠. 하지만 이 중 두 곳에선 취소됐어요. 해당 브랜드의 제일 작은 옷마저 저한테 너무 컸거든요. 한국에선 제가 정말 뚱뚱하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에선 제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란 것을 이해 못하더라고요.”
국내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2013년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후다. 많은 사람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개념과 존재를 처음 인지하는 계기였다. 뼈가 보일 정도로 마르지 않아도 모델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 다양한 사이즈의 모델이 있고 실제 이들을 기용하는 브랜드가 해외에 존재한다는 것, “크지만 아름답다”가 아니라 “크고 아름답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조금씩 각인됐다.
한국에 처음 알려졌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기사가 한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렸는데, 악성 댓글로 도배됐죠.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요. 표현을 잘 못하시는 편인데도 ‘힘내라’ ‘우리 딸 대단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왜 그러시지’ 하고 댓글을 봤는데… (잠시 숨을 고르며) 그때 달린 악플이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나요.”
그런데도 인터뷰를 굉장히 다양한 매체와 여러 번 하셨어요.
“그래서 더 많이 인터뷰했어요. 어지간하면 거절 안 했고요. 심지어 육아용품을 다루는 곳이랑도 했는걸요.”
악플이 두렵지 않았나요.
“나를 보고 누군가는 괜찮을 테니까, 누군가는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아니까요. 스스로 괜찮다고 말해줄 수 없다면 ‘내가 말해줘야지’란 마음이었어요.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서) 인터뷰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그대로의 몸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데뷔는 했지만, 바로 전업모델로 활동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델 일만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란 개념 자체가 거의 없던 한국에선 더욱 그랬다. 그는 소셜코머스 회사에서 일하고, 외식업·구매대행 쇼핑몰 등도 닥치는 대로 했다. 66100이란 브랜드를 만든 건, 데뷔 4년이 지나서다.
잡지를 펴낸 이유가 있나요.
“제가 모델이란 점이 반이죠. 독립잡지가 여럿 나오던 흐름도 있었고요. ‘내가 언제 패션지 표지에 실릴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단독 표지로 서고 싶은데 까마득했죠. ‘나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기존 잡지가) 나를 써주지 않는다면 나를 취직시킨다는 생각으로요.”
‘판을 직접 만들자’던 방송인 송은이씨가 떠오르네요. 쇼핑몰로는 어떻게 확장하게 된 거예요.
“돈을 벌어야만 했죠. 처음엔 50만원으로 시작했어요. 동대문에서 좋은 옷을 보면 우리 집 옥상에서 옷 사진을 찍었고, 그걸 페이스북에서 알음알음 한 벌 두 벌 팔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첫 달에 10만원 벌고, 둘째 달에 20만원, 그다음에 40만원, 80만원… 이렇게 성장하면서 조금씩 안정됐죠.”
66100엔 여느 쇼핑몰과 다른 점이 있다. ‘섭식장애지지모임’ ‘사진포비아’ 세미나, ‘목요회’ 등 여성의 몸과 외모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소모임이 열린다. (2020년 코로나19로 오프라인 모임이 잠시 중단됐다.) 일정액을 내고 신청하면 체형 치수를 정확히 재고,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살펴보고, 이에 맞춰 어울리는 옷을 제안하는 ‘1대1 스타일 컨설팅’ 서비스도 있다.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사랑하기 위한 계단을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스타일 컨설팅 서비스는 어떤 건가요.
“많은 손님이 자신의 사이즈를 잘 몰라요. 막상 입어보니 안 맞는다며 반품하고요. 그러다 쇼룸에 오면 많이 울고 가세요.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어본 적이 처음이고, 옷 입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건 줄 처음 알았다고 해요. ‘정말 잘 어울려요’라는 말에 눈물을 쏟곤 하죠. 쇼룸에 일부러 다양한 종류의 옷을 많이 들여요. 누군가에게 ‘신데렐라 드레스’처럼 꼭 맞는 옷이 되길 바라면서요.”
66100에서 제작·판매하는 속옷은 사이즈가 6가지로 5XL(엑스라지)까지 나온다. 신발도 270㎜까지 판다. 뚱뚱한 몸이면 으레 어두운 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편견도 부순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의 옷이 쇼룸을 가득 채운 이유다. 김 대표는 딸과 함께 이곳을 찾는 어머니들을 경계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딸의 몸을 제일 엄격하게 심사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딸과 함께 올 때가 가장 어려워요. ‘우리 딸이 살이 너무 쪄서 맞는 옷이 없어요. 너무 뚱뚱해 보여요’ 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따님에게 카드만 쥐여 보내세요, 제발.(웃음)”
잡지 <66100>은 휴간 중이라고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나오고 4년간 휴간 중이죠. 잡지라는 게 나 자신과 사람들의 호의를 갈아넣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구조더라고요. 올해 5년 만에 새 호가 나올 거예요.”
어떤 내용이 담기나요.
“‘옷과 몸’에 대한 여성 89명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각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표정을 한 사람들인데 속상한 일, 걱정하는 것, 꿈꾸는 일이 다 비슷하단 점이 흥미로워요. 트라우마도 비슷해요. 엄마 이야기를 안 한 인터뷰이가 없어요.(웃음) 엄마의 영향권에서 살아가는 딸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상반기 안에 내놓는 게 목표예요.”
섭식장애지지모임에서 섭식장애 관련 여성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겠어요.
“대개 다이어트 강박이 있는 분들이 오시죠. 섭식장애가 있다는 걸 모르고 오기도 해요. 예를 들어 ‘엄마랑 같이 있으면’ 또는 ‘집에서 밥을 먹으면’ 속이 답답하고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섭식장애예요. 한국 여성 가운데 섭식장애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거의 없을 거예요. 먹는 일에 불편함이 있냐 없냐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확연해요. 개인이 해결하기엔 너무 큰 문제고요.”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사회 변화가 필요할까요.
“정책으로 바꿀 것이 있어요. 교복을 일정 사이즈 이상 반드시 만들거나, 학생들은 계속 자라니까 교복에 반드시 밴딩(고무줄)을 넣거나, 식이 교육을 하고 학생을 상담하거나, 신체검사를 할 때 특정 BMI(체질량지수) 기준에 다다르지 못하면 상담받는다든지… 몸 다양성센터도 필요하고요.”
외국에는 김 대표의 바람처럼 ‘외모 다양성’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좀더 구축된 편이다. 프랑스에선 BMI 18 이하 모델이 무대에 오를 수 없다. 모델 사진의 특정 부분을 보정한 경우 반드시 ‘수정된 사진’임을 밝혀야 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도 지나치게 마른 모델은 패션쇼에 서지 못한다. 영국은 정당과 교육기관이 연계해 ‘몸 이미지’ 연구 보고서를 꾸준히 펴내고, 미국엔 ‘미디어에서 건강한 몸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
섭식장애 관련 통계는 한국에도 있다. 서울의 여자고등학생 10명 중 3명(31.2%)이 자신이 살찐 상태가 아님에도 살쪘다고 생각하고(2019년 서울시 청소년 통계), 최근 5년간(2015∼2019년) 국내 거식증 환자 중 10대 여성 청소년이 14.4%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국민건강보험공단). 하지만 통계로 그칠 뿐이다.
“해외 제도도 많은 여성이 섭식장애로 죽고 나서야 생겼어요. 여성 건강을 해치는 환경과 관례를 고치는 장치가 필요한데 한국에선 그런 논의가 전혀 없어요. 죽기 전에 (제도로) 막을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을까요.” 김 대표가 제도 변화를 열망하는 이유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든 뒤 ‘모든 무게를 떠안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일을 이어가는 동력이 됐지만 동시에 개인을 소진하는 일이었다. 뜬눈으로 밤새워가며 운영한 지 꼭 7년이 되는 2020년, 그에게 ‘번아웃’이 왔다.
최초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알려진 점이 큰 부담이 되진 않았나요.
“지난해 벽에 완전히 부딪혔어요. 잠을 못 자고 이틀씩 깨어 있었죠.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갔죠. 아직 새로운 나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어떤 페이스로 걸어야 하는지, 내가 얼마큼 짐을 질 수 있는지를 새로 재보고 체득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오늘의셀프칭찬’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는 글이 눈에 띄어요.
“저 자신이 작아 보이곤 했어요. 머릿속에선 ‘쓰레기같이 이것밖에 못하면서 사업한다고’ 이런 소리가 맴돌고요. 저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데도 공포감이 컸어요. 친구가 보다 못해 ‘셀프 칭찬 일기’를 써보라고 했죠. (괜찮은 척하기보다) 솔직하게 ‘안 괜찮다’는 말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고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SNS에 제가 어떤 상태인지 적었어요.”
효과는 있었나요.
“확실히 있어요. 나 자신한테 (완전히) 관대해졌다까진 아니지만, ‘덜’ 조바심 나게 되더라고요. 빨리 원래대로 돌아와야지 하며 스스로를 보챘는데 ‘지금 내 상태도 나 자신’이란 생각으로 바뀌는 데 도움이 됐어요.”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주의해야겠네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꽃 피는 봄이 아니라고 해서 계절이 아닌 건 아니잖아’라고요. 눈 오고 비바람 분다고 해서 그 순간이 제 삶의 계절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그 이야기를 오래 잊어버리고 있던 것 같아요. 나를 늘 예뻐해주진 못해도 적어도 나를 비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 대표는 데뷔 뒤 7년간 몸무게가 그대로였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먹는 양 대비 활동량을 계산했다. 플러스 사이즈라 해도, 일정한 사이즈를 벗어나지 않고 ‘프로포션’(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여기서 벗어난 건 2016년 여성환경연대에서 ‘살찔 권리, 시선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기’란 주제로 강연을 준비하면서다. 나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재단한 경험을 반추하며 그는 청중에게 들려주고 싶던 많은 이야기가 실은 자신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란 점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나를 그 자체로 좋아해주는, 내가 봄이든 여름·가을·겨울이든 여전히 계절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자각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몸’은 고정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늘 변하기에 “지금보다 마른다고 자신을 더 긍정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한다. 매일 되뇐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고.
‘멋지다’란 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지원하려고 결심했을 때, 잡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지인에게서 “봄이 아니면 어째서 계절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 김지양 66100 대표가 꼽은 ‘삶을 바꾼 순간’들이다. 남편이 그에게 “멋진 여성”이라고 말해준 순간도 그중 하나다. “그 말이 더 멋진 여성이 되고 싶게 하더라고요.” 왜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멋지다’는 말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을까.
“‘예쁘다’란 단어에 사회가 주입한 고정관념이 반영됐기 때문이에요. 눈이 크고 날씬한 여성처럼 전형적인 이미지요. 모두가 다 그런 형태로 예쁠 필요는 없잖아요. 멋지다는 건 제게 ‘예쁘다’란 말에 담긴, 통상적 관념에 갇힌 아름다움이 아니라 더 다양한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느껴졌어요. ‘예쁘다’는 말이 여성의 이미지를 고정하거나 여성의 위치를 격하하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의미 그대로 쓰이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존재를 김지양 대표로 인해 알았다. 그의 등장을 환영했고, 그의 활약을 응원했다. 나 역시 지금껏 내 몸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보고 자란 모든 여성이 그랬다. 모두가 다이어트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미디어는 끊임없이 그렇게 돼야 한다고 부추겼다. ‘탈코르셋’ 운동이 퍼지기 전 등장한 그의 존재는, 마치 깃발을 높이 들고 시위대 저 앞에서 뛰어가는 이를 보는 듯했다.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의 아픔이 눈에 띄면서다. “저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 악플에 시달리고,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하고, 기존 모델들에 비해 아직도 충분하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터뷰(<여성신문> 2019년)나, “저는 조금씩 천천히 나아지고 있어요. 포기하지 않도록 애써볼게요”란 SNS 글을 봤다. 어쩐지 마음이 덜컥했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무엇이 그를 지치게 한 걸까. 그가 내는 속력에 견줘 사회의 속도는 왜 이리 더딘 걸까. 그 안에서 그는 어떤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궁금했다.
통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 김 대표와 나눈 긴 대화 이후, 이름 앞에 붙은 여러 직함보다 이런 수식어가 먼저 떠올랐다. 내 존재 그대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회적 표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혐오를 쏟아내는 일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내 몸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글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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