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권력이나 지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알린 피해자에 대해 취해지는 명예훼손 혐의의 제소,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성적인 배경을 증거로 고려하는 것 등의 실행은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2차 피해를 가하게 된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명예훼손을 범죄로 규제하는 한국 형법 체계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이전에도 유엔은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해왔지만 그 초점이 ‘양심과 표현의 자유’ 침해 방지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자 보호로 옮겨간 것이다. 진실을 말하려는 입을 틀어막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는 지금까지도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재피해화’를 막는 조처로 국제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성폭력 피해자의 고발을 돕고 2차 피해를 방지하려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손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8년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Me too)’가 여론의 정점이었다.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위반으로 역고소를 당해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신분이 뒤바뀌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당장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적다. 누구보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들을 보호할 다른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한국적 특수성’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물론 학교폭력, 직장 내 괴롭힘 같은 범죄, 갑질의 피해자를 무차별적인 신상공개와 악의적인 댓글로부터 보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쓰인다. “피해자를 대리하다보면 2차 가해의 대부분이 명예훼손이다. 성폭력 사건, 학교폭력 사건 가해자나 제3자가 피해 사실이나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해 말하고 각종 소문에 시달리게 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가해자를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 위해 상담하러 오기도 한다.”(이은의 변호사)
김지은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보좌관 출신 어아무개씨는 안 전 지사의 성폭력 피해자인 김지은씨 관련 기사에 ‘이혼도 함’이라고 댓글을 달았다가, 정보통신망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어씨는 ‘이혼 사실을 적은 것은 가치중립적인 사실을 표현한 것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2020년 10월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이혼 전력은 공적 관심사가 아닌 오로지 사적 영역에 불과하고, 이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행위의 전형”이라고 지적하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 과정에서 ‘증거 불충분’이나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그럴 때 가해자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역설적으로 진실을 한 번 더 다퉈볼 기회가 생긴다. 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가해자를 성폭력범죄 혐의로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피해자가 고소당한) 명예훼손 재판 과정에선 판사가 성폭력 여부가 사실인지 허위인지 다루게 된다. 여기서 사실이라고 인정받으면 성폭력 피해자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
특수한 미디어 환경의 영향도 크다. 2016년 헌법재판소도 정보통신망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합헌 결정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특수성’을 제시했다.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정보통신망에서의 명예훼손 행위로 인해 개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등 그 폐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지금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으로 보호받는다. 성폭력범죄의 수사·재판 담당자는 피해자의 인적 사항과 비밀을 공개하거나 타인에게 누설해선 안 된다(제24조 1항). 또한 누구든지 피해자 인적사항을 인쇄물, 방송,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개할 수 없다(제24조 2항).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의 피해자 쪽은 피해자 실명이 적힌 편지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한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와 이를 게시한 블로그, 인터넷 사이트 등을 경찰에 고소하면서 이 규정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서혜진 변호사는 “피해자 신원을 특정해야 법을 위반한 것이 되는데, 특정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다 알아볼 수 있는데다 인쇄물에 싣거나 방송·정보통신망에 공개해야만 처벌받고, 옆사람에게 말한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결국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제도적 장치는 부족하고 그들을 2차 공격하는 문화가 완연한 ‘이중고’를 함께 해결해야 완전한 폐지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말할 자유를 누리면서도 보호받을 권리도 보장하는 대안이 다양하게 나온다. 먼저 현행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고 성폭력처벌법의 구멍을 완전히 메우는 것이다. 예컨대 수사·재판을 통해 얻은 정보가 아니라 사적으로 피해자의 정보를 얻은 경우라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또 인쇄물, 방송, 정보통신망을 통하지 않은 방식으로 피해자 정보를 밝혔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유지된다면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행위에는 법 적용을 배제(위법성 조각 사유)하는 방법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가해자나 제3자가 피해 사실을 드러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여전히 형법으로 다툴 수 있고,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드러내며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은 처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와 대검찰청은 2018년 5월, ‘성폭력 수사 매뉴얼’을 개정해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행위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역시 반론이 있다. 수많은 범죄 피해 가운데 유독 성폭력범죄 피해에만 예외를 적용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를 대리하는 김재련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관해 가해자가 유리하냐, 피해자가 유리하냐로 볼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 사건에만 국한해 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손지원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폐지하되 타인의 사생활과 비밀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성폭력 피해 사실도 사생활에 들어가므로 보호막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되지 않는다면 현행 ‘반의사불벌죄’인 이 규정을 ‘친고죄’로 개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수사할 수 있는 친고죄는, 고소가 없더라도 수사기관이 수사에 들어갈 수 있는 반의사불벌죄에 견줘 형벌권 발동이 엄격하다. 무엇보다 제3자의 고발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공인의 지지자나 팬클럽이 남용할 수 있는 위험이 적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표지이야기-'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운명은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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