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반복되는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장애인 학대 범죄다. 그러나 어딘가에 갇혀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만이 학대는 아니다. 장애인 명의를 도용해 이득을 얻고, 부당한 계약을 하게 하는 사기 범죄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애인 학대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학대 예방과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7∼2019년 최근 3년간 19살 이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형사 판결문 1210건을 전수 분석했다. 그 결과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해 싼값 혹은 대가도 없이 넘겨받거나 피해자 명의로 대출받아 돈을 가로채는 범죄가 다수 포착됐다. 길 가던 지적장애인을 불러 세워 윽박지르거나 저렴한 요금이라고 속여 필요하지도 않은 휴대전화와 통신서비스 계약을 하게 해서 이익을 얻는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피해를 인지하기 어렵고 피해 사실을 알더라도 경찰에 신고하기 어려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이 증폭한 ‘장애 취약성’이 낳은 구조적 문제다.
“당사국은 가정 내외의 모든 형태의 착취, 폭력 및 학대로부터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입법적, 행정적, 사회적, 교육적 및 그 밖의 조처를 한다.” 2006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인권리협약(CRPD) 내용 일부다. 2008년 대한민국 국회는 이 협약을 비준했다. 그러나 권리 구제를 받지 못한 장애인이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구제를 청원할 수 있는 제도가 포함된 선택의정서엔 가입하지 않았다.
학대 예방을 위해 적절한 조처를 마련하려면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학대 위험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별도의 범죄 통계도 작성하지 않는다. 계속 변화하는 학대 특성에 대한 조사나 연구도 부족하다. 우리는 장애인 학대를 예방하기 위한 첫걸음조차 떼지 못했다._편집자주
“따지고 싶어요. 왜 그랬느냐고….”
11월17일 오후 경북 구미에서 만난 김진하(22·가명)씨는 1년 전 겪은 범죄 피해를 떠올리며 말했다. 2019년 9월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쓰지도 않은 휴대전화 소액결제 60만원(당시 월 최대한도)이 청구된 것이다. 그해 10월에도 같은 금액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52)는 ‘네가 게임 아이템을 산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진하씨는 억울하고 속상했다. 120만원은 스무 살부터 대구 카페에서 일한 진하씨의 한 달 급여였다.
휴대전화를 잠깐 가져간 아이들이 있었다. 출퇴근길에 ‘함께 놀자’며 다가온 고교생 2명. 진하씨는 매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 대중교통을 타고 일터로 향한다. 퇴근 시간과 이동 경로도 항상 일정하다. 그는 자폐 증상이 있는 발달장애인이다. 발달장애란 일상과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아우르며, 중증장애로 분류된다. 어딘가 달라 보였던 진하씨를 가해자들은 눈여겨봤을 터이다. 일터 앞까지 찾아와 두 번째 범행을 한 이들은 진하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자신들의 전화번호와 통화기록을 모두 지운다. 미궁에 빠질 뻔했지만 숫자 암기 능력이 뛰어난 진하씨가 전화번호를 기억하면서 범죄 사실이 드러났다.
가해자들은 진하씨에게 개인정보를 슬쩍 물어본 뒤 휴대전화 결제로 물품을 사고, 이를 업자에게 싼값으로 되파는 ‘소액결제 깡’을 했다. 가해자는 처벌됐지만 손해 본 120만원은 돌려받지 못했다. 가해자 쪽은 합의에 나서지 않았다. 민사소송을 해도 실익이 없을 게 뻔했다. 어머니는 “피해가 더 크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며 사건을 애써 지웠다. 진하씨가 겪은 것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장애인 학대 범죄가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장애 취약성을 악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범죄는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장애인 관련 범죄를 대표적 인권침해인 ‘학대’로 규정한 건 고작 8년밖에 되지 않는다. 2012년 10월 장애인복지법 개정으로 ‘장애인 학대’ 개념이 비로소 도입됐다. 이 법에선 장애인 학대를 ‘신체·정신·정서·언어·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 경제적 착취, 유기 또는 방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2017년 전국 17개 시·도에 학대 신고 접수와 피해자 지원, 재발 방지를 위한 사후관리 등을 전담하는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설치됐다. 2020년 7월 보건복지부와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발간한 ‘2019년 장애인 학대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19년 학대로 판정된 1258건(중복 학대 포함) 가운데 328건(26.1%)은 경제적 착취였다. △신체·정신적 자유를 빼앗은 채 노동을 강요하고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장애수당 같은 사회복지 급여를 가로채며 △명의를 도용해 이득을 취하거나 부당한 계약을 체결하게 하는 행위 등이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19살 이상 성인 장애인이 피해자인 형사사건 판결문 1210건을 분석한 ‘장애인 학대 처벌실태 연구’를 보면, 경제적 착취 범죄(120건) 피고인 148명 가운데 60명은 장애인에게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해 싼값에 넘겨받거나 대가를 주지 않는 ‘휴대전화 깡’을 저지르고, 피해자 명의로 대출받아 돈을 가로채는 등 대출 유도 행위로 처벌받았다. 경제적 착취 가해자는 피해자의 가족·친인척(9명)뿐 아니라 지인(60명), 고용주(18명), 모르는 사람(20명), 동거인(8명), 채팅 등 인터넷으로 알게 된 지인(10명), 거주시설 종사자(6명) 등 광범위하다. 특히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휴대전화와 통신서비스 계약 과정에서 주로 발달장애인을 속이거나 협박해 이득을 취하는 범죄가 잦다. 2019년 장애인 학대 보고서에서 학대로 판정된 경제적 착취 중 51건은 상업시설에서 발생했다. 그중 33건이 휴대전화(이동통신사) 대리점에서 일어난 피해다.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하거나 대출을 유도해 이득을 얻는 범죄는 전형적인 경제적 착취지만, 장애인복지법에 규정된 금지 행위엔 포함돼 있지 않다. 장애인복지법은 학대 일부를 금지 행위로 규정(제54조의 9)하고 형법보다 강화된 처벌(제86조) 조항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착취를 학대로 보는 인식은 낮은 편이다. 게다가 이런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 범죄 피해를 구제받으려면 가해자가 장애인 당사자의 의사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법원에서 인정해야 한다.(상자기사 참조)
이정민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 팀장(변호사)은 “국가 통계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따로 분류하지 않다보니 학대 특성 분석과 그에 따른 예방과 구제책 논의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강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정책국장은 “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 범죄는 형법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혐의 입증이 쉽지 않고, 금전적 피해에 대해선 이동통신사나 금융기관에 민사소송을 내서 계약을 무효화하거나 채무를 탕감받아야 하는 등 사후 권리 구제도 복잡하고 어렵다”며 “애초 이런 범죄가 심각한 학대이며 강하게 처벌받는다는 사회적 경각심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6년 7월 부산에 사는 지적장애인 ㄱ(28)씨는 길을 가던 중 이동통신사 대리점 직원의 호객 행위에 넘어가 휴대전화를 새로 개통했다. 그리고 2018년 1월까지 같은 대리점에서 휴대전화 9대, 태블릿피시 2대, 인터넷, 인터넷티브이(IPTV) 서비스 이용 계약을 맺었다. 2018년 12월 부산에 사는 지적장애인 ㄴ(22)씨도 길을 가다 대리점 직원의 호객 행위에 이끌려 휴대전화를 개통한다. 그리고 약 3개월 동안 대리점 두 곳 직원들의 강요로 휴대전화 5대, 인터넷, 인터넷티브이 서비스 이용 계약을 추가로 하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부산에 있는 또 다른 이동통신사 대리점 직원은 ㄴ씨 명의로 인터넷을 개통해 지인 집에 설치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ㄱ씨와 ㄴ씨를 비롯한 지적장애인 11명, 60대 청각장애인 1명 등 12명은 2020년 6월 부산지방법원에 KT 구현모 대표이사와 엘지(LG)유플러스 하현회 대표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대리점이 장애 취약성을 악용해 과도한 서비스 이용 계약 120여 건을 체결했다며 이런 계약이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소송을 낸 이들 다수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일 만큼 경제적으로 취약하나, 휴대전화 여러 대의 통신요금과 단말기 대금, 중도 계약 해지로 인한 위약금까지 물고 있었다.
이 소송을 지원한 부산장애인권익옹호기관 박용민 관장은 “비슷한 피해가 잦아 대리점 직원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어선 문제 해결에 한계가 커서 이동통신사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라며 “비장애인이라면 호객 행위에 혹해 휴대전화를 개통했더라도 이후 여러 대를 계속 개통하진 않을 것이다. 피해를 인지하기 어렵고, 피해 사실을 알더라도 경찰에 신고하기 어려운 ‘장애 취약성’을 악용한 학대 행위다”라고 설명했다. 소송대리인 변현숙 변호사는 “KT와 엘지유플러스가 원만한 해결을 위해 당사자들과 합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1년 전 휴대전화 소액결제 피해를 겪은 진하씨는 이제 잘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여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얼마 전 대구에서 구미 카페로 출근하던 길에 비정부기구(NGO)와 후원 약정을 했다. 진하씨와 4년 동안 함께 일한 대구 ‘카페풍경’ 조성태 대표는 후원약정서를 발견하고 “스스로 원해서 기부하기로 한 거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하고 싶어서 한 거냐”고 물었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은 기부라는 걸 확인한 그가 NGO에 항의해, 후원 약정은 없던 일이 됐다.
올해부터 진하씨는 오전엔 대구, 오후엔 구미 카페 두 곳에서 일하며 생활 반경을 한 뼘 더 넓혔다. ‘사람이 더 많은 곳’에서 일하는 게 그의 꿈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숨 쉬고 싶은 진하씨를 학대 위험 속에 몰아넣지 않는 사회는 언제쯤 가능할까.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 문헌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피해 방지, 무엇이 우선인가’, 김동현·박혜진, 2019년
‘장애인학대 사건 법률지원 매뉴얼’, 서울지방변호사회, 2019년
‘장애인권리협약과 의사결정지원 제도화를 위한 국제적 모색’, 박인환, 2019년
*표지이야기-장애인 학대 판결문 분석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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