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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낙태죄 폐지, 시간끌기는 지배자의 폭력

등록 2020-11-14 01:36 수정 2020-11-16 15:5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처음 손가락 크기만 한 초록색 이파리들이 땅에서 올라올 때만 해도, 나는 그게 상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불과 며칠 만에 이파리는 어엿한 ‘잎’이 됐고, 그 잎의 크기와 색깔 모두 그전에 봤던 상추와는 달랐다. 그 식물은 얼마 전에 허리띠를 둘렀다. 그제야 알았다. 아, 배추구나!

배추마다 둘러진 허리띠를 보니, 뭘 잘 모르는 도시인간인 나조차 배춧속이 차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배추 한 동 한 동마다 허리띠를 맸을 손길들, 그 손길에 담겼을 마음에 대해서도 상상하게 된다. 건물 뒤편 햇볕이 가까스로 드는 작은 공터에 가지를, 고추를, 방울토마토를, 상추를, 그리고 이번에는 몇 동의 배추를 심은 것은, 건물 청소를 맡은 환경미화원분들이라고 했다.

공터가 텃밭이 되기까지

“여자들은 땅 놀리는 꼴을 못 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좁은 땅이라 ‘공터’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땅이, 각종 작물이 차례로 자라는 밭이 된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중장년 비정규직 노동자일 그들의 하루는 참 고단할 것이다. 그 고단함 사이에도 ‘시간을 내어’ 잠시도 땅을 놀리지 않고 부지런히 작물을 심고, 키우고, 또 새 작물을 심고, 키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자원’ 같은 것이 아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흐르지도 않는다. ‘시간 내서 만나자’ 같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시간은 ‘내는 것’ 그리고 ‘만드는 것’이다. 또 어떤 경험을 통과하며 ‘겪는’ 것이기도 하다.

갑자기 난데없이 시간을 내어 ‘공터’를 ‘텃밭’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떠올린 건, 오랜 기간 싸워온 시민들의 시간이 한꺼번에 망쳐질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낙태죄’를 유지하려는 정부 법안 이야기다. “나중에” 연발, 탁현민 비서관, 안희정씨에게 보낸 ‘대통령’ 명의 조문화환,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 차별금지법…. 성평등에 관한 한 이 정부는 당선 전부터 지금까지 ‘무엇에 실망하건 그 이상의 실망을 맛보게’ 하고 있다.

시간 끌기는 지배자의 폭력

시효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나온 정부 법안은, 그야말로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라는 슬로건의 최신 사례라 할 만큼 기만과 퇴행 그 자체다. 정부 법안이 가진 수많은 법적 오류, 정치적 기만, 사회적 해악에 대해서 많은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 분노와 싸움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1년 반 전인 2019년 4월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이 정부가 낭비한 그 긴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정부 입법예고안에 합법적 임신중단 기준으로 적힌 ‘14주’(14주 이내에는 처벌하지 않겠다)나 ‘24주’(성범죄로 인한 임신 등 특정 사유를 증명하고, 의무적으로 상담받고, 의무 숙려시간까지 거친 뒤라면 처벌하지 않겠다)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이러한 ‘주수 제한 조항’은 그 자체가 여성이 겪는 시간에 대한 총체적 무시와 불신을 드러낸다. 14주? 24주? 원치 않는 임신 이후 여성이 겪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임신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겪는 불안과 공포, 앞날에 대한 온갖 고려, 일과 생계와 가족관계의 총체적 흔들림, 자기 몸의 상태, 인생 전체를 놓고 숙고하고 또 숙고하며 보내는 시간에 대해, 정부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알고자 한 적이라도 있는가?

‘시간 끌기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을 끄는 것은 명백히 ‘전략’이고, 그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지배집단이다. 약자는 ‘시간을 버텨야’ 하지만 강자는 ‘시간을 끌수록 유리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입장을 관철한다. 헌법재판소가 정한 법 개정 시한은 2020년 12월31일이다. 정부 법안의 ‘입법예고 기간’(국회로 넘기기 전 법안에 대해 개인·단체가 의견을 낼 수 있는 기간)이 11월16일까지다. 시간이 없다. 시간을 내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전희경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옥희살롱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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