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이 잔인한 달이라 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한국에서 이 문구가 어울리는 계절은 5월일 것 같다. 화창한 봄날처럼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차례대로 5월을 열지만 곧이어 괴롭고 잔인한 역사가 펼쳐진다. 5월18일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와 공수부대 투입으로 시작된 광주 민주화운동은 5월27일 전남도청 최후의 결사항전과 계엄군의 학살로 끝난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것처럼 5월 광주는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엘리엇의 표현을 빌리면, ‘죽은 땅’ 광주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키워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죽음을 애도하고 희망을 다짐한 시와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잔인한 5월
20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민주화운동 세대는 청와대와 국회 177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됐다. 광주항쟁은 국가기념일이 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도 부르는 노래가 됐다. 권력을 모두 쥔 사람들이, 부와 명예 따위는 필요 없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헌신하자는 시를 힘차게 외치는 장면은 괴이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거름이 아니라, 과거를 추억하는 노래가 됐다.
투쟁이 추억이 되는 것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민주화운동은 드라마와 상업영화의 좋은 소재다. 운동했던 사람 중 소수는 순서를 기다리며 가슴에 금배지를 단다. 권력을 쥔 이들이 내준 돈과 인맥은 다시 시민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된다. 윤리적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세력은 권력을 쥘 자격이 있다. 다만 민주화운동 세력이 자신의 변화된 위치를 자각하기 바랄 뿐이다. 일부 민주화운동 세력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토착왜구의 공격으로 규정하거나 헌신적이었던 과거의 운동 경력으로 덮으려 한다. 권력의 자리에서 피해자 자리를 탐하는 인지부조화는 여론과 정치를 왜곡한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조금은 불편했으면 좋겠다. 386세대(1990년대에 30대인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의 일부 동지와 후배는 아직 임을 위한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5월17일 ‘90학번’ 송유나씨가 암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다른 세상을 꿈꾸며 학생운동에 청춘을 바치고,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에서 12년간 노동운동과 에너지전환운동을 했다. 드라마 <화양연화>의 주인공 유지태가 91학번이니, 그의 추억 속에나 존재했을 이상한 운동권 선배 정도 되겠다. 누군가에겐 과거의 추억이 누군가에겐 삶과 죽음이 오가는 현재다. 고백하자면 나는 송유나씨가 누군지도 몰랐고,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도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었다. 12년 전 5월에는 두산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로 살아가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변우백씨가 지게차에 치여 사망했다. 변우백씨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월31일에는 알바연대 대변인 권문석씨의 7주기 행사가 열린다.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해 ‘투명인간’이란 별명이 붙은 사람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쩐지 나는 점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자신이 없다. 나를 지우고 좋은 세상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은 힘찬 팔뚝질만으로 지키기 힘들다. 글을 쓰고, 강연하고, 언론 인터뷰로 이름을 남기는 것은 ‘뜨거운 맹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깃발만 나부끼는 곳을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당당히 지키고 싶다. 권문석씨는 죽은 뒤 <한겨레21> 표지에 얼굴과 이름이 실렸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울면서 웃었다. 송유나씨도 죽은 뒤 그의 사진과 이름이 박힌 추모 웹자보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랐다. 그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나마 이름을 남기고 싶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나간 모든 이와 함께. 투쟁.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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