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영국 아카데미 사우스노드에서 학생들이 GCSE 수학 시험을 치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고등학교 1학년 국어시험이라 생각하고 풀어보자. 시간은 2시간 준다.
※A와 B 영역에서 한 문제씩 골라 각각 350~500개 단어로 두 개의 작문을 하시오.
A. 토론과 주장 (택1)
1.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난하거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도 큰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속담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까?
2. ‘장유유서’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지켜온 도덕적 규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장유유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미덕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주장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3. 폐회로텔레비전(CCTV) 설치는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주장과 ‘사생활과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 가운데 어느 것에 동의합니까?
B. 묘사와 서술 (택1)
1. 가족이 모두 나가고 오랜만에 집에 혼자 있는 오후 시간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 주변 상황과 함께 여러 감각(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을 통해 묘사하십시오.
2. 누군가에게서 어떤 식물인지 모를 씨앗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 씨앗을 화분에 심어 키우며 다 자란 식물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갖는 감정을 다양한 감각과 함께 묘사하십시오.
3. 1부터 9까지 중 하나의 숫자가 중요한 사건의 열쇠가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쓰십시오.
2017년도 케임브리지 국제GCSE (중등교육일반자격증) 한국어 작문 시험 중 일부다. 영국 중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졸업시험 선택과목으로 한국어를 선택할 경우 이 시험을 본다. 읽기 시험도 있다. 그것도 2시간이다. 긴 지문 두 개의 내용을 이해하고 두 텍스트를 비교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청준의 , 박완서의 , 신경숙의 , 조창인의 같은 소설이나 신영복의 아니면 잡지에 실린 산문이 지문으로 나왔다. 이 시험은 한국어가 제1언어이거나 그 수준으로 유창한 학생들이 칠 수 있다. 우리로 치면 중3, 고1 정도의 나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다큰아이가 이 시험을 한번 보겠다고 해서 이런 게 있는지 알았다. 학교 선생님이 집에서 연습해보라며 기출문제를 뽑아줬다. 문제지부터 낯설었다. 질문은 다 합해도 한 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빈 종이 답지가 9장이다. 이 문제는 GCSE 영어과목 시험문제와 형식이 거의 같다. 영국에서는 영어시험을 이런 방식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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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시험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정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내 답을 쓰는 것이 좋았다. 정답은 없다. 좋은 답이 있다. (물론 까다로운 채점 기준이 있다.) 나는 내가 학교 다닐 때 지겹도록 봤던, ‘주어진 보기’ 가운데 정답을 하나 고르는 시험이 싫다. 그때는 그 폐단을 잘 몰랐다. 지금은 안다. 그 훈련의 결과는 너무 강력해서 나는 지금도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힘들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 정답이 아닌 것 같으면 나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그런데 살다보니 정답 없는 일이 더 많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답’이다. 공부는 사실 되도록 좋은 답을 찾기 위한 훈련이어야 했다.
나는 이 시험에서 [묘사와 서술] 부분, 특히 감각이나 감정, 상황을 언어로 묘사해보라는 질문이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500단어 분량의 긴 글로 묘사하려면 (참고로 이 글은 여기까지가 약 400단어다),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사람과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감정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건 좋은 스토리텔러가 되는 훈련이다.
교육으로 시작해 미궁으로 빠지는한국의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30여 명과 만나 교육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시험문제를 보여줬다. 아이들은 특히 [묘사와 서술] 문제를 좋아했다. “사악한 인물 또는 친절하고 신뢰가 가는 인물 (실제 또는 가상인물)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사람의 신체적 특징과 습관 등에 중점을 두어 묘사하십시오”라는 문제를 듣고는 “우와!”라고 말했고, “지금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배경은 아주 오래된 건물입니다. 시간은 밤, 갑자기 불이 나가고 누군가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이 부분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 되게 이야기를 만들어보십시오”라는 문제를 듣고는 “대박!”이라고 했다. 그 끝에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겠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교사연수 자리에서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났다. 이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들이 말했다. “맞아요, 우리 아이들도 몇 번만 연습하면 이 정도는 잘 쓸 겁니다.” “독서반 아이들이 하면 좋겠네요.” “국어시간에 한번 해봐야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 학생들만큼 성실하고 진지한 학생들은 세상천지에서 찾기 어렵다. 정말 이런 수업을 교사가 재량껏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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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관련해서 입시제도 개혁 같은 큰 이야기를 하다보면 수십 가지 ‘안 되는’ 이유가 먼저 떠오른다. 시험제도는 교육 문제로 시작했다가 결국 취업, 소득불평등, 취약한 사회안전망 같은 사회경제적 구조 문제로 발전해 결국 미궁에 빠지기 일쑤다. 교육 문제를 교육 논리로 풀 수 없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교육 현장에 좋은 교사가 많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을 해보려는 교사를 정말 많이 만났다. 그래서 바람이 생겼다. 이런 먼 나라 이야기가 그분들에게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되기를. 그래서 학생들 몇 명이라도 공부가 ‘재미있다’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욕심내자면 정답을 고르는 것을 넘어 자기 답을 찾아볼 힘을 조금이나마 기를 수 있기를. 이 아이들이 살 세상엔 그런 능력이 더 필요할 테니.
이스트본(영국)= 이향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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